매서운 겨울바람에 화려함을 뽐내던 형형색색의 꽃들이 숨어버려도, 동백나무는 남도의 따사로운 햇살을 머금고 초록 잎 사이로 빨간 동백꽃을 오롯이 피워냅니다. 특히 흰 눈이 나뭇가지와 잎 위에 소복하게 쌒인 날의 빨간 동백꽃은 더욱 특별합니다. 대개의 꽃이 꽃잎을 하나씩 떨구는 것과 달리 동백꽃은 질 때 꽃잎이 전부 붙은 채로 한 송이씩 떨어지는데, 마지막 모습까지 비장하고 처연해서일까요. ‘애타는 사랑’이라는 동백꽃의 꽃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한겨울의 동백꽃 같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2019년 가을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는 이유로 동정과 연민, 오해를 받고 살아가는 동백이의 삶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순박하기가 이를데 없는 용식이의 우직한 응원과 뜨끈한 사랑이 동백이의 세상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애달픈 동백이의 삶에 기적같은 일들이 일어나가 시작합니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게장마을이 제가 대학생활을 한 포항이기도 하였기에 반가운 마음과 동백이의 애달픈 삶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또 동백이의 삶의 변화와 이를 품어내는 술집 까멜리아라는 공간에 대한 동경의 마음으로 한동안 드라마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라마의 여운이 지나갈 무렵, 또 한 명의 동백이를 만났습니다.
굴곡진 삶이었습니다. 누군가 본다면 버려진 삶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르는 삶이었습니다. 비교적 부유하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태어난 그녀의 삶에 슬픔과 비극이 찾아온 것은 첫 결혼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십대 초반 직장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에게는 숨겨둔 아들이 있었고, 남편은 술과 도박, 여자에 빠져 경찰서를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딸을 출산하기도 하였으나 남편의 생활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도리어 폭언과 폭행을 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남편의 폭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심각해졌고, 결국 그녀는 어린 딸을 데리고 집을 떠나 친정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안정을 되찾을 때 쯤, 뜻하지 않은 기회로 그녀는 어린 딸과 함께 시골의 한 부자집에 다시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결혼이었습니다. 시댁 식구들은 처음에는 그녀를 환대하는 것 같았으나, 아들을 출산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태도를 바꾸어 그녀와 딸을 차별하고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딸에 대한 시댁식구들의 부당한 대우는 시간이 갈수록 더해갔고,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다시 딸만 데리고 집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딸과 단 둘이 월세방을 구해 생활하며 딸을 제대로 키우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았습니다. 엄마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딸은, 다행히도 건강하고 밝게 자라주었고 학업과 생활에도 성실하여 장학금도 받고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딸의 건강한 성장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고 두 번의 결혼생활이 그녀에게 낸 상처는 너무나 깊고 명백했습니다. 그녀의 굴곡진 삶에는 남자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두려움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모순되게도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바램은 점점 간절해져만 갔습니다. 남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는 트라우마로 남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세 번째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다지 잘난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까지 만났던 남자들과는 달랐습니다. 마음 깊이 그녀를 생각하고 위해주었습니다. 다시 남들처럼 함께 여행도 하고 외식도 하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행복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된 다툼의 과정에서 모두 아물지 않은 그녀의 오래된 상처가 터지고 말았고, 남자는 칼에 찔렸고, 순간 정신을 잃은 그녀의 손에는 칼이 들려있었습니다.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자 정신이 든 그녀는 울면서 지혈을 하며 119에 신고했습니다. 응급실에서부터 남자가 안정을 되찾고 퇴원을 할 때까지 그녀는 매일같이 남자의 곁에 머물며 극진하게 간호하였습니다. 경찰에서도 사건이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구속의 시기를 늦춰주었습니다.
선을 넘어버린 순간이었고, 다시 버려져도 무방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에게 다시 찾아온 사랑은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자, 남자는 절뚝거리는 발로 법정에 나와 그녀를 용서한다며 진심으로 선처를 구했습니다. 저 역시 정성을 담아 그녀의 굴곡진 삶과 다시 그녀에게 찾아온 사랑의 진실성에 대해 변론했습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녀의 자랑스러운 딸은 자신을 위해 살아온 엄마를 위해, 가슴이 절절한 편지를 썼습니다.
몇 주가 지나 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판사는 판결을 선고하며 이례적으로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라며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매년 빨갛게 핀 동백꽃을 보면 문뜩문뜩 그 겨울에 만났던 그녀가 생각납니다. 평범한 사랑을 꿈꿨던 그녀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드라마와 같은 기적이 그녀의 삶에도 찾아왔을까요. 그녀가 그토록 꿈꾸고 바랬던 사랑에 대해 판결한다면 어떠한 판결이 내려지게 될까요. 혹 할 수 있다면 그녀의 행복을 바라며 이렇게 판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