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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철 Sep 19. 2023

변론일기 #8 앞서지 않는 마음

#8 대여금 사건

#8 대여금 사건 - 앞서지 않는 마음


변호사로 일하다 보면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의뢰인에게 반대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의뢰인의 생각과 저의 생각이 다를 경우인데, 참으로 곤혹스럽기가 이를 데가 없습니다.   

   

나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변호사가 나를 반대하고 있는 모습을 마주할 때 의뢰인이 느끼는 당혹감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마음이 빠른 의뢰인은 변호사가 이미 결론을 냈다고 생각하고는 열부터 내시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마다 의뢰인께 제가 여전히 당신을 위해 생각하고 당신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드리는 말씀이 변호사로서의 직업적 양심에 따라 의뢰인을 위해 드리는 고언(苦言)이라는 점을 진심을 눌러 담아 말씀드립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의뢰인들께서는 전투 태세를 풀고 제가 드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오늘 참 어렵고 복잡했던 사건에서 승소한 의뢰인과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자랑을 좀 섞자면 사건의 결과에 변호사의 몫이 상당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공을 들였고 결과도 좋았던 사건입니다. 오래 전 돈을 빌려주었는데, 상대방이 제대로 갚지 않자 빌려준 돈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건 대여금 사건이었습니다. 말로는 간단한데 의뢰인과 상대방이 서로 돈을 주고받은 기간이 십수년이 더 되었고, 차용금 뿐만 아니라 곗돈도 섞여 있는 바람에 의뢰인의 주장을 정리하는 것부터 참 어려웠던 사건이었습니다. 게다가 상대방은 돈을 모두 갚았다며 모두 부인하는 상황. 책 한권 분량의 예금거래내역서와 계 장부를 찾고 일일이 검증하며 의뢰인의 주장을 정리하고 입증했고, 법원은 의뢰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제 승소한 결과에 따라 상대방으로부터 돈을 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치열하게 다퉜던 상대방은 돌연 입장을 바꾸어 항소를 포기했고, 빠르게 갚을 테니 일부 감액해달라며 백기 투항하였는데 상대방의 요청이 과하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집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얼른 변제받는 것이 백번 나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뢰인은 결단코 합의할 수 없다는 뜻을 고수하였고, 대화는 길어졌습니다. 긴 대화는 이 사건의 핵심이 당사자 간의 권리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에 쌓여 풀리지 않은 감정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제가 의뢰인께 수긍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대여금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여름, 남쪽으로 가는 길에 만난 유화같은 하늘


그 어떤 인생도 간단하지 않고, 이 세상에 단선적인 관계는 결코 없다는 사실, 긴 시간 켜켜이 쌓여 얽히고설킨 인생과 관계를 다루는 사건에 법률적인 정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정답이 의뢰인의 인생의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 그 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을 수 있다는 말이 그저 허무맹랑한 궤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변호사로 일하며 매일 같이 깨닫습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고, 할 수 있고, 의뢰인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명백하더라도, 의뢰인의 사정에 따라서는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납득하기란 여전히 어렵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변호사 일을 하며 늘 고민하고 괴로워할테지만, 그럴 때마다 이렇게 되뇌어 보려 합니다. 


“내 마음은, 내 생각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의뢰인의 인생을, 마음을 앞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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