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의 스포일러가 담긴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를 보면 해사한 얼굴을 가진 '도준'은 그 등장부터 애스럽다.
서사의 작동 배경에는 그가 소위 동네 바보라는 밑바탕이 있겠지만 사실 모든 영화의 인물적 특성이 그렇듯 은유적 상징성도 배격할 수 없다. "마더"의 도준의 어머니는 극 내에서 석자의 본명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개인의 특정성과 규정성으로 포획되지 않는다. 영화의 테마와 모호함을 결속하는 순기능도 있지만 연출은 결말의 귀결을 위해 봉사하기도 한다.
영화 시작점에서 홀로 안개가 살포시 에두르고 있는 배경의 갈대밭에서 독무를 추는 '마더'. 영화의 종반부에 들어서는 미신의 망각의 침자리에 침을 놓고 지평선에 녹아드는 황혼을 후경으로, 관광버스 복도 속 운집된 무아지경 중년의 군무 안에 용해된다. 이 장면으로써 마더의 서사는 개인의 서사에서 모정의 전형으로 보편화됨을 은유한다.
영화 마더 내에서 대외적인 성인의 조건은 이성과의 잠자리를 경험했는가이다. 진태는 도준을 향해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는지 질의한다. 성관계는 어른으로서 등극하기 위한 내밀한 성인식, 일종의 입사(사회로의 진입) 세리머니라 일컬어진다. 도준은 진태에게 당돌하게 자봤어!라고 대답하고, 누구냐는 반문에 처연하게 엄마랑이라고 응답한다. 이는 유약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꽤나 진솔한 연출이다. 가령, 속옷 차림으로 암역을 더듬거리며 누울 자리를 찾고 엄마와 대면한 채로 밀착하여 이부자리를 공유하는 시퀀스는 노골적이거나 직접적인 성관계의 묘사는 없어도 에로스적인 암시가 있다.
아동기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는 낙담(discourage)에 있다. 바로 어머니와 아동의 관계의 외연적 전개를 차단하는 강벽인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연적 앞에서 아이는 굴하면서 다른 이성을 탐색하는 신성한 여정을 시작한다. 이 장기적이고 원심적인 여정을 거쳐 아이의 영적 성장은 결실을 맺고 어른으로서 또 다른 가정의 구심점이 된다. 그러나 영화 '마더'에서 해준의 아버지는 출현은 고사하고 언급조차 없다. 이는 도준이 어머니 모성에 잔류하는 현황을 조명하는 연출이다. 또한 도준 스스로 해결해야될 누명 문제를 외재 요건으로 점철되는 모친의 주관으로써 소산시킨다는 방증에서 모정 대한 갈급함과 집착을 시사하기도 한다.
도준은 여자랑 자야 된다는 계속적인 음성으로 목적을 상기하며 여성과의 육체적인 관계에 집착한다. 그것이 그가 신용하는 어른이 되기 위한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정신적 성숙은 육체적 관계로부터 발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어리숙한 발상에 집착한 이유는 제대로 된 자아 성숙에 당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폐단은 어머니의 과도한 집착과 통제에 있다. 초자아적인 부모의 온전한 통제와 규율은 자녀를 바른 길로 통솔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흔히 마마보이라고 총칭하는 비대한 풍골의 아이를 양산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선 초자아적 모성애 아래에서 정말 물리적 발육만 작용한 아기를 연출성 직언로 보여준다. 마녀 '유바바'는 시종일관 본인의 아이를 위해 불의의 희생하고 무조건적인 모성애를 표방하는 인물이다. 그 지극 정성에도 그녀의 아들은 정서적 성숙을 완수하지 못한, 통제 불능의 거대한 아기의 형상으로 조형된다. 모성애를 표방한 초자아적인 부모의 집착과 과도한 통제와 간섭, 가정교육은 역설적으로 자녀의 자아 성장을 억제한다. 그리고 영화 <마더>에서 그렇듯 종종 아동적 성향이 유형화되어 종종 영화 주제의식으로서 수면 위로 부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