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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정 Aug 05. 2022

<위플래쉬> 작용/반작용과 자기파괴충동

<위플래쉬>의 스포일러가 담긴 글입니다.

드럼의 타악은 작용과 반작용의 양가적 충돌에서 급격히 태동하는 음향의 조율이다. 영화 위플래쉬의 테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관용구와 같이, 부상을 불사하고 주저 없이 두 인물의 필사적인 기세와 기세가 전력으로 전면 충돌할 때의 공명이 영화를 리드미컬하게 조탁한다. 그러나 작용 반작용이라는 물리적 충돌에는 명징한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두 유기체의 인력과 척력을 오가는 듯한 동질적이고 역동적인 왕복 운동은 상흔과 출혈을 유발하고 상호적이거나 때로는 일방적이기도 한 파괴성을 동반한다.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사에서 창작의 산통이 사라질 일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 고통을 신비화할 필요는 없다고 직접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포괄한 예술의 영역이 선사하는 숭고함과 신비성, 또한 그것을 총망라한 주관적인 감상의 질료를 잠시 덜어낸다면, 예술이라 함은 고통을 견지한 자기파괴충동을 가진 인간성의 외연 확장에 불과하다. 그 말인즉슨, 예술이야말로 태곳적 본능의 생리활동일 뿐이다.


타악, 작용과 반작용성 혈투


다시 말해 예술은 광폭적 감정 표출이라는 측면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플래쳐 교수는 앤드류를 드럼스틱으로 심벌을 내리치듯 강타(물리적인 체벌과 정신적인 폭언)함으로써, 앤드류 내면의 분노와 자기파괴충동을 증폭시킨다. 영화는 줄곧 이런 식으로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변용한다. 한 시퀀스를 예를 들자면, 플래쳐 교수는 "나는 이유가 있어서 이곳(셰이퍼 음악학교)에 왔다"라는 말을 앤드류가 복창하도록 독려하여 자존감을 고취시키고, 그 직후 앤드류의 연주가 성에 차지 않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뺨을 때리며 고성을 지른다. 이러한 획책을 사용하여 인물을 패닉 상태로 몰아넣은 플래쳐는 앤드류에게 "나는 분하다"라는 감정 표현을 반복적으로 외치도록 호되게 명령하며 감정의 낙차를 조축하고, 그 원리로 제자(앤드류)의 정서에 개입한다.


앤드류가 이런 완악한 플래처 교수를 마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은 앤드류 친부의 귀책이다. 앤드류의 아버지는 표면적으로 앤드류에게 다정다감한 아빠이다. 그러나 실상은 편부모 가정 아버지의 어쩔 수 없는 운명적 책무 중 하나인 앤드류의 자아 성장을 보조하는 것에 극도로 무색한 보호자이다. 오히려 친지가 합석한 식탁에서 오히려 아들의 자존감을 감퇴시키는 등 부모로서의 책임을 면피하고 방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앤드류 부자는 영화를 같이 감상하는 취미가 있기에, 아버지는 서로 정서를 충분히 교감한다고 오단하지만, 실질적인 대화를 통해 교류하지 않기 때문에 아들과 같이 보낸 물리적 시간은 전부 무용해진다. 예를 들어, 영화를 관람할 때 팝콘 위에 초코볼을 얹어먹는 것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다르게 아들인 앤드류는 그 방식을 달가워하지 않는데, 놀랍게도 이 사실을 언지해주기 이전에는 취미를 공유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아버지는 결코 인지하지 못했다. 즉 어떤 면에서는 기억할만한 추억을 갖거나 소식을 공유하는 활로를 선제적으로 차단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부자끼리 부대껴가면서 관람한 영화이었던 것이다.


면전에 윽박을 지르고 제자를 손찌검하는 플래쳐 교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플래쳐 교수의 호통과 폭력의 틈입은 무력한 매너리즘에 빠진 앤드류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다. 마치 멜랑콜리에 침잠하는 환자들이 자해와 문신에 현혹되듯, 무덤 해진 삶의 연쇄부터 구원해줄 외부 자극을 그는 사실 고대중이었다. 앤드류는 플래쳐 교수의 방법론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음을 확언할 수 있음에도 아버지와는 판이한 플래쳐 교수의 현현한 형상에 무언의 감복과 예술적 경외심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선두에 말했듯이 작용과 반작용은 파괴를 필연적으로 촉발시킨다. 앤드류가 헤드 드러머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주의 없이 운전하다가 측면에서 빠르게 질주하는 거대 트럭에 충돌하고, 차량이 전복되어 피를 질질 흘리며 처연하게 기어 나오는 모습이 그 직접적 예시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장기간 연습의 결과로 물집이 잡히고 피가 흥건히 흐르는 손을 지혈하고 치료하는 대신에 냉수에 주먹을 식히며 선혈을 유리잔에 확산시키는 장면에서는 주인공이 육신의 파괴로부터 내밀한 해방감과 희열을 감각한다는 심상까지도 획득할 수 있다.


트럭과 충돌하여 차량과 같이 충돌에 손상되고 전복된 인물의 모습


결전의 무대에서 합주의 정형에서 벗어나, 플래쳐와 종주의 궤도에서 이탈한 앤드류가 무대 위 수평적 관계로서, 달관한듯한 연주로 지휘자(플래쳐)와 왕복하며 한 번씩 주고받는 듯한 종반의 카메라 무빙 연출은 가히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작용 반작용의 가장 정열적이고 인상적인 변용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제자(션 케이시)를 불행의 말로로 이끈 것에 대하여 전혀 회한이나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플래쳐의 성향에서 투사되듯, 영화는 예술을 담보로 자기파괴적인 삶을 존속하는 것은 결코 유익하지 않음을 꼬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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