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나 현상으로부터 벗어나서
나는 영화나 드라마 속의 엑스트라에 몰입하는 습관이 있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사는 모 그룹 회장 일가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부부는 금실이 좋고 어린 딸은 까탈스럽지만, 본성은 착하다. 바쁜 부부는 항상 수행 비서를 데리고 다니지만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둘은 입맛이 까다로워 아침 식사를 다 남긴 막내딸을 위해 저녁에는 자주 가는 좋은 식당을 예약한다. 그런데 즐거운 저녁 식사 시간 도중, 식당 아르바이트생이 실수로 딸의 옷에 음식을 쏟는다. 종업원이 안절부절못하며 변상 이야기를 꺼내자, 딸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괜찮다고 대답한다.
여기까지를 보고, 나는 출근해서 바쁘고 피곤해 죽겠는데 앞에서 느끼한 말을 하는 상사의 모습까지 견뎌야 하는 수행 비서에 대해 생각한다. 열심히 준비한 식사를 자기 손으로 버려야 했을 가정부와 음식이 쏟아진 옷의 가격을 가늠하며 불안해하는 아르바이트생을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은 주연과 조연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 (물론 나보다는 미국 대통령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이 훨씬 크겠지만, 그것이 미국 대통령이 세상의 주연이라는 뜻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그저 각자의 삶이 있는 개개인이 서로 부딪히거나, 거리를 지키며 살아갈 뿐이다. 생각보다 타인의 삶은 납작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공평한 자아를 나눠 가졌고 적당한 인과 관계를 갖고 행동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숫자에 매몰된 사람들이 보인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통계가 된다. 몇 명이 죽고 다쳤는지는 사건의 규모를 보여주지만, 사건을 규모로만 보면 우리는 그 안에 있는 삶을 읽을 수 없게 된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나와 완전한 타인인 사람들의 이름은 무엇이고, 그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꿈은 무엇이었는지를 왜 알아야 하느냐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왜 자꾸 그들에게도 가족과 친구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반대로 나의 가족이었으면 어땠을지를 생각하라 종용하냐고.
이름과 삶, 꿈은 그들이 숫자로 가려지지 않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가족과 친구가 있다는 것은 그들이 세상의 엑스트라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개인과 연결된 개인임을 알려준다. ‘나의 가족이었으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은 나 역시 타인에게는 납작한 숫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기억하고 들여다보는 것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를 통해 간단하여 두세 자리 숫자가 아닌 개개인의 삶을 읽게 되면, 우리는 다짐할 수 있다.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말자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에는 그런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참사 앞에서 우리는 항상 예민해져야 한다. 그들을 현상이나 통계만으로 보지 않기 위해서…….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를 추모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