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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희 Sep 25. 2022

안정적인 직업이 사실은 독이었다

예상치 못한 한직으로 발령이 났다.

공무원이라는 특성상 30년의 근무 기간 동안 평균 2년에 한 번 꼴로 부서를 이동했다.

이삿짐을 싸는 건 일도 아닌데, 이번엔 왜 이렇게 몸이 말을 안 듣는지, 나이가 많아 퇴물 취급을 받아 밀려난 것 같은 패배감에 한참을 꾸물거리다 에잇! 필요치 않은 용품들을 과감히 정리해 버렸다. 그렇게 딱한 박스만 들고 이동을 했다.

새로운 부임지는 하수처리장이었다. 한 박스밖에 안 되는 짐조차 풀고 싶지 않았다. 마치 이 짐을 풀고 나면 

여기에서 영원히 갇혀 빠져 나갈 수 없을 것 같아  필기구 몇 개만을 꺼내 들고 업무를 시작했다.     


좋지 않은 일은 왜 이리 한 번에 몰려오는지 새로운 부서에는 하필 직원마저 부족했다.     

기존 인원으로도 커다란 하수처리장의 업무를 하느냐고 야근을 밥 먹듯이 했다고 하던데

출근 첫날부터 가뜩이나 마음 둘 곳 몰라 우왕좌왕하던 나는 완전 힘이 빠져버렸다.     


그렇게 한번 펑 뚫려 나간 마음의 구멍은 아무리 업무가 바빠도 사람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도 예쁜 옷을 사 입어도 메꾸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헛헛해지고 숨 막히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돌이켜 보니 매일 주어진 일만 하며 안정적으로 살아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뭘 원하는지조차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이 없었다

'나는 여태 뭘 하고 산 거지? 뭘 위해 이렇게 열심히 직장에 매달렸던 거지?' 늘 안주하고 살던 사람에게 갑자기 찾아온 위기감은 삶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건드렸다.

 

불현듯 오래전 직장에서 직속 후배에게 승진에 밀린 후 퇴사하여 공부를 시작해서 책 쓰고 강연도 하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선배가 생각났다.

'선배가 승진에서 밀리지 않았다면 나처럼 매일매일 반복되는 쳇바퀴 안에 있었을 텐데, 어쩌면 이건 기회이지 않을까?


나는 하수처리장으로의 좌천에 대해 어떻게 해서든 설욕의 기회를 노리고 자존심에 상처 입은 마음을 보상하겠다는 분노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뭔가를 배워야 했다. 회사를 떠나든 여기서 복귀를 하든 뭐가 되었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업무 과중으로 근무 시간도 모자라서 틈틈이 야근까지 하면서

업무에 매달려야 했는데 30년 동안 손 놓고 있던 공부를 갑자기 하려고 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혹 시간이 생겨도 하지 않던 공부가 그냥 되는 일은 없었다.     

그 선배에게 일어난 성공적인 신화는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낮엔 업무로 밤에는 공부로 숨 돌릴 시간 없이 나를 휘몰기는 했으나

오히려 시작한 공부를 하나도 완성하지 못했다는

좌절감만이 한 꺼풀 더 씌워졌다.   

    

생각해보니 온몸에 힘이 너무 들어갔었다.

한직으로의 발령에 대한 거부의 힘, 빨리 원상으로 복구해야 한다는 초조함의 힘,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의 힘까지 더해져 내 숨통을 내가 꽉 막고 있었다.     

내 숨통을 트여주고 내 몸에 힘을 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안정적이란 예측할 수 있음이다.

내 직업을 물어보는 누군가에게 공무원이라고 하면 대부분 내 미래가 안정적임을

쉽게 예측하면서 부러워하곤 했다.

나도 내 미래가 내 직업이 펑 뚫린 고속도로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났을 때는 쉽게 무너지는 모래성이었다.     


나는 나의 뇌 구조를 바꾸기로 했다.

안정적이라는 것에 발목 잡히지 않고

스스로 불안정 속으로 뛰어드는 숨 가쁜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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