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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오늘 뭐 먹지?> 리뷰

by 자유인

대학에 들어와 알게 된 인생의 새로운 즐거움 중 하나는 좋아하는 작가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기 마련이다. 책 내용이나 작가의 문체에 빠져들고,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기 시작하고, 궁극적으로는 작가의 신간을 기다리며(어디까지나 작가가 살아 있는 경우에) 애독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대학에 들어와 좋아하는 작가가 여럿 생겼다.


책 <오늘 뭐 먹지?>를 읽게 되었다. 책 전체가 노란색이라 다른 책에 비해 눈에 확 띄었고, 요즘 부쩍 요리에 관심이 늘어 책 제목 역시 눈길을 끌었다. 솔직히 말하면 책을 읽기 전 책에 거는 기대는 거의 없었다. 책 디자인과 폰트, 전반적인 색조가 요즘 유행하는 감성 에세이와 빼닮았기 때문이다. 제목도 뭔가 가벼운 느낌이다. 내용에는 깊이가 없고, 대부분의 지면을 일러스트로 채운 “요즘 책”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 의아했던 점은 작가 경력이었다. 작가 소개를 보니, 작가는 소설가였다. 내 독서 경험상 소설가가 에세이를 못 쓰는 경우는 못 봤다. 더군다나 그녀는 보통 소설가가 아닌, 소위 권위 있는 문학상을 두루두루 휩쓴 짬밥 있는 소설가였다. 책의 외형과 작가 경력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간극에 당황스러웠다.


책은 외형주의 편견을 박살 내는 데 충분했다. 권여선은 쫄깃한 한국어로 책의 마지막까지 독자 입맛을 다시게 했다. 책은 계절별로 큰 목차, 작가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세부목차가 나뉜다. 책 제목은 <오늘 뭐 먹지?>이지만 사실 <술 마시면서 뭐 먹지?>, <해장으로 뭐 먹지?>가 더 정확한 제목일 것이다. 책 전체가 사실상 작가의 화려한 안주 컬렉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사실을 눈치챈 나는 독자 이전에 한 명의 애주가로서 책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어떤 에피소드가 나오건 이야기의 구심점은 음식(또는 술)이다. 대학 시절, 모처럼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우연히 선배 두 명과 마주치고, 분식집에서 만두를 먹자는 선배의 제안, 술을 안 마시나 싶어 실망하지만, 끝내 따뜻한 만두와 함께 소주를 곁들인 이야기는 참으로 훈훈하다. 내가 대학생이어서 그런지 대학 시절을 회고하는 모든 이야기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에피소드엔 술이 빠지지 않는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맨정신으로만 인생을 살기엔 인생이 너무 길다고 말했다. 참으로 공감 가는 말이다. 술을 마시면, 더디게 가는 시간의 눈금을 몇 단계 훌쩍 뛰어넘어 갈 수 있다. 누군가는 이를 낭비라고 하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용의 시간은 인생에 필요한 법이다. 숙취의 시간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그 시간만큼은 침대에 처박혀 몇 시간째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애주가들은 무용의 시간을 이렇게 확보한다.


작가는 음식에 따라 자신만의 레시피를 소개한다. 하지만 레시피는 주부들이나 따라 할 수 있을까, 요리 초보인 내가 따라 하기엔 무리가 크다. 그 점이 유일하게 아쉽다. 그것 말고는 전부 좋았다. 흥미로운 에피소드에 잘 쓰인 에세이가 모두 그러하듯 철학적 깊이도 담고 있다. 맛과 음식을 묘사하는 다채로운 한국어는 작가 내공을 입증한다. 권여선은 요리를 좋아하고, 애주가이며, 무엇보다도 빼어난 작가다. 좋아하는 작가 리스트에 들이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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