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1.
삶에 희망이 없을 때,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나.
만약 오늘 하루, 삶의 모양새에서 나의 의지가 거세될 때. 나의 존재가 단순 번호로 매겨지고 의지가 있는 인간이 아니라 단순 사물로 여겨질 때. 나는 사람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나.
2.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이다.
나치가 수용소 안에서 한 일들은 유명하다. 사람의 체모를 전부 밀고, 효용이 다할 때까지 하나의 노동력으로 취급한다. 노동력이라고 하면, 기업에서 일하는 직원으로도 볼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의미가 아예 다르다. 나치 산하 수감자들은 그 환경에서 하나의 부품이었다. 죽으면 버려지고, 죽기 전까지 에너지 하나까지 뽑히는 그저 자원, 부품.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생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3.
수용소로 간 수감자들은 처음에 충격을 받는다. 심리적 반응의 제1단계다. 사람으로 존중 받지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박탈 당하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원고에 대해 이야기하고, 즉각 경멸당하는 단계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 다음은 '상대적 무감각 단계'다. 무감해진다. 이는 고통과 혐오와는 별개다. 앞서 충격을 받는 건 정상적인 반응이다. 사람들은 인생을 부정당하고, 자신이 하나의 도구로 전락할 때 충격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감각 단계는 어떠한 일에도 정상적인 반응을 보일 수 없다. 동정도 힘들다. 12살 소년의 발이 썩어가는 걸 보면서도, 무감하게 볼 수 있다. 옆에서 친구가 눈밭을 맨발로 걷게 돼 엉엉 울어도, 주머니에 있는 빵을 조금씩 떼어서 먹는 데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태도는 일종의 방어 기제다. 날카로운 현실과 비참함에 감정이 갈린 사람처럼, 현실과 나를 분리한다. 이 때 사람은 그대로 퇴행한다. 그리고 결국 현실과 나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고 분리하는 단계가 온다.
4.
그렇다면 그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선택이 없을까. 빅터 프랭클은 이 상황에서도 동정을 베풀고 음식을 나누던 이들을 기억한다. '영혼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결국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이들이 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느냐는 개인이 결정하는 영역이라는 의미다.
5.
수감자들을 생각해보자. 이들의 상황은 언제 희망이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치가 언제 전쟁에서 패배할까, 우리는 우리의 인생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미래도 없고 삶의 목표도 없는 생존 상태'는 사람을 과거로 돌아가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인생에 '왜'를 부여할 수 있다면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6.
그럼에도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가능한 태도다. 사실 불가능할 수 있다. 그 생각이 자꾸 들었다.
7.
우리는 어떻게 '실존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로고테라피'는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는 '실존적'이라는 의미에 대해
'존재 그 자체, 즉 인간 특유의 존재 방식'
'존재의 의미'
'각 개인의 삶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력, 즉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라고 말한다.
우리는 실존적인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무너진다. '왜'를 찾아서 그 상황에서 도전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긴장하는 게 사람에게 삶의 동력을 만든다.
8.
나의 동력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