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읽으려고 했었는데 막상 책을 펴니 진도가 안 나가서, 도저히 읽어지지가 않아서 포기한 책들이 있다. 이번에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도 그랬고, 안나 카레니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런 책들도 비슷했다. 처음 몇 장을 넘겼을 때 특유의 번역투라던가 어려운 등장인물 이름들이 나오면 왠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다들 유명한 고전들이라서 읽어보고 싶었는데 막상 읽으니 역시 고전은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구나라며 책을 덮었다. 합리화를 하며 읽기를 포기했다.
8월에는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던 중에 그동안 읽으려다 실패한 책들이 생각났다. 처음에 읽고 싶었던 것도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긴 시간 동안 잊히지 않고 각종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존재하고 있는 책이라서... 그러니까 그냥 궁금했다. 대체 어떤 고상한 내용이 있길래?
세계지리를 잘은 모르지만, 그리스 하면 산토리니의 하얀 건물과 푸른 지중해가 떠오르고, 지중해 하면 또 한 여름이 떠올라서 그래서 이번 달엔 이 책으로 정했다. 그리고 또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새로 사기에는 조금 그래서 회사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렸다.
2.
책의 주인공인 조르바가 말하길 여자라는 존재는 남자의 관심을 영원히 원한다. (응?) 조르바는 어릴 적에 나이 들어서도 예쁘게 단장하는 할머니를 보고 비웃었다. 상처 받은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조르바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래서 조르바는 저주를 받아 영원히 여자를 쫓아다니며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소설의 중반부까지, 내가 마음이 꼬여서 그런가, 조르바가 내뱉는 여성 편력과 비하와 같은 묘사들에 기분이 나빴다. 어쨌든 나도 여성인데, 내가 이걸 끝까지 계속 읽어야 하나? 대체 왜 이 소설이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찾는 고전이지? 이런 의문이 계속 들었다. 여성이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이야기되는 대상이 되는 것 같은 생각에 조금 불쾌했다. 조르바도, 조르바를 지켜보는 “나”도 모두 남자이다. 그러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소설 속에서 남자와 여자를 뒤바꾸더라도 이야기되는 성은 분명 기분이 나쁠 것이다. 게다가 좋은 이야기도 아님. 기분은 불쾌했지만, 일단 펼친 책이니 성을 배제하고 계속 읽었다.
그러다가 이 대목에서 조르바에게 조금 마음을 열었다. 조르바는 단순하게 여성을 대상화했다기보다는, 남자건 여자건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동일시하며 원시적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와 남자인 화자가 자연적으로, 동물적으로 여성을 그렇게 바라본 것이지, 다른 성을 비하하고 배척하는 시선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지 않을까? 그냥 남자, 여자가 아니라 인간도 하나의 동물에 불과하다. 자유를 갈망하는 동물,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 다소 변화무쌍하고 투명하고 더 자유롭긴 하지만 역시 육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소 과장되어 있고 긴 여행으로 지치고 물려받은 짐에 짓눌려 있기는 하나 육체 또한 영혼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왜 화자가 꼭 남자였어야 하냐고 하면, 발칸 전쟁 등 시대적인 면을 고려하고, 또 작가가 남자니까? 등등 그리고 외설적인 욕설도 상당히 많이 나오기는 하는데, 소설 속의 배경 - 크레타 섬에서의 갈탄광 채굴, 농민과 노동자의 삶 등 -을 고려해보면 고상한 대사들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조르바는 거칠지만, 따뜻하고, 자유롭고, 신비로운 바다 같았다. 책 밖에 모르던 화자는 조르바를 통해 온 몸으로 자유의지에 대해 느낀다. 결국 마지막에는 조르바처럼 춤을 추게 된다.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3.
지난 5월에 나팔꽃 씨앗을 심었다. 겨우 겨우 싹이 터서 조금씩 자라다가 어느 순간, 지지대를 넘어서서 마구잡이로 자라기 시작했다. 기댈 곳만 있으면 끝까지 올라갈 기세였다. 안타깝게도 나팔꽃 줄기에게 베란다는 좁고 낮아서 올라가는 것을 멈췄다. (대신 자기 줄기를 지지대 삼아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갑자기 8월에 하얗고 끝은 연한 보라색인 부드러운 꽃 봉오리를 보여줬다. 그러더니 다음 날 아침 쨍한 푸른빛의 꽃이 폈고, 그 날 저녁 꽃은 졌다. 내가 손 쓸 새가 없이 식물은 줄기는 자라고, 잎은 무성해지고 꽃을 피우고, 또 금세 졌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이다.
조르바는 죽는 것은 무섭지 않고, 늙는 것이 두렵고 싫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죽는 순간까지 조르바는 똑같은 깊이와 속도로 살았다. 나는 죽는 것도 늙는 것도 무섭고 싫다. 죽는 것이 싫은 이유는 죽음의 순간이 고통스러울까 봐, 늙는 것이 싫은 이유는 어제의 내가 영위하던 삶이 내일의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될까 봐이다.
육체가 늙고 삶이 끝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보기 위해 그 안의 본질이 변하지 않고 같은 결로 사는 것은 어떨까. 젊은 나도, 늙은 나도, 살아있는 나도, 죽은 나도, 결국 나일 것이다. 나팔꽃은 처음 딱딱한 씨앗일 때부터 “나팔꽃”인 것처럼 (이름이 그렇다는 것이다.) 육체의 한계 속에 나를 가두지 말고 자유롭게 풀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