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끄러미 다가선다_Ep.2
우두커니 섰다. 대상과 상황을 바라보기만 했던 나는, 나를 대상으로 삼아 물끄러미 다가서기로 했다.
뉴질랜드에 있는 오클랜드 대학에서 유학하기로 정했을 때, 3년의 시간이 인생의 공백기가 될 거란 불안도 역시 안고 있었다. 나의 불안이 크지 않았던 탓일까, 혹은 나의 설렘이 더 컸기 때문일까, 방향을 바꾸지 않고 염려를 표지판 삼아 길을 쭉 따라가고 있다. 그 어느 나라보다 굳게, 오래 닫혀있던 뉴질랜드의 국경은 막다른 길이 아니라 조금 긴 신호등일 뿐이었다. 야심한 밤, 바뀌지 않는 빨간불로 인해 뒤에서 기다리던 차들이 쌍라이트를 깜박이며 빠르게 지나가도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나에게 맞는 신호와 시기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다른 차들이 지나가도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잠시 흐트러졌을 수도 있다. 흐트러진 마음이 정지선을 지나 가지를 뻗진 못했다. 신호등에서 벗어나 바닥에도 머무르고 있는 빨간 불빛들이 가지들을 잘 타일러 주었다. 그러면 이내 처음의 뿌리로, 본심으로 돌아오곤 했다.
외부의 자극만을 응시하며 반응해야 했던 나는, 뉴질랜드에 온 지 6개월 정도가 되어서야 시선이 닿는 곳을 전환시켜 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처음의 뿌리와 본심에 담겨있는 것들을 되새김하며 지내기에는, 나는 조금 적응이 느린 편이었다. 그래서 잠시 표지판도 보지 못하고, 신호등도 인지하지 못한 채, 곁에 가는 차들을 따라 길을 달려왔다. 따라만 왔다고 생각했었지만, 어느새 알지 못하던 표지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간혹 방향이 같은 차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이내 모든 이들은 서로 다른 가지들을 뻗어내고 있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여전히 불안이 있음에도 새로운 뿌리가 돋아났다는 것이 감지되었다. 뿌리에서 빨아들여진 것들은 소나기의 첫 빗방울처럼 굵고 확실하게 줄기를 적셨다. 찬 물기에 정신을 깨워보니 빨간빛이 조금 길었던 신호등이 재차 뿜어내는 초록빛에 홀려 내달리고 있었다. 조금 꼬불거리긴 했지만 곁길 없이 쭉 이어진 길 덕에 방향을 잃진 않았었나 보다. 신호등이 뿜어낸 초록빛과 들판에서 자라난 초록빛을 분간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 경계가 서서히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의지대로 잠시 멈춰 들에서 피고 지는 태양빛에 마음을 적시기도 하고, 멀리 내다보며 앞으로 갈 길을 부드럽게 다뤄보기도 한다.
시선에 슬며시 힘을 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