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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Aug 11. 2022

준비 없는 마흔 다섯의 퇴사, 그 동화같은 결말

마흔의 자기대본 포티폴리오 _  잔혹과 교훈 그 사이 어딘가

동화라고 모두 아름다운 결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잔혹동화가 더 현실에 가까우니까.


아침 7시 37분,

매일 같은 시간에 눈을 뜬다. 이 시간은 고요하다.

와이프는 일을 나갔다. 중 3아들은 방학을 맞아 늦잠을 자게 두고 조용히 거실로 나와 맨손 운동을 한다. 간단한 체조, 푸시업 250회(물론 5번에 나눠서 한다), 아령 들기 120회, 스쿼트 100회. 벌써 2년 6개월 째 유지하는 루틴이다.


시간은 약 25~30분정도. 너무 과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다. 근육질 몸을 만들 작정은 아니므로 배가 나오지 않는 선에서 만족한다. 그래도 몸의 선은 제법 잡혔다. 키 180, 몸무게 69선을 수년째 유지하는 중이다.


이 루틴을 유지한 후 밤에 깨는 일이 사라졌다. 회사에 다닐때 생겼던 공황증세도 완전히 사라졌다. 거의 날마다 술에 야식에 쩔은 몸과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간 기분이다. 땀을 조금 흘린 후 샤워를 하고 자리에 앉으면 상쾌한 성취감이 밀려온다.


역시 퇴사는 아름다운 선택이었다. 동화같다...라고 하려는 순간


'생활'이 고개를 쳐들며 외친다.


"돈은 어떡할 거야? 통장 잔고좀 봐!"


퇴사 당시 이정도면 어느정도 버티겠지 싶었던 계좌 잔고는 어느새 바닥으로 치닫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새 2년 반째 수입없는 백수 생활이 이어지고 있으니 제3자가 보기엔 기겁할 일이다. 남들은 몰라도 양가 부모님은 내색은 못하고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요즘 같은 시기에 부부 중 한사람의 수입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쌍발 엔진으로 가도 시원찮을 판에 단발 엔진이라니. 남은 엔진마저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아르바이트 수준이다. 꺼진 엔진이 주소득원이었다면, 쪼그라드는 건 당연지사다.


아끼던 로드바이크며 쓸만한 것들은 죄다 내다 팔았다. 한달 교통비를 포함해 10만원 정도의 생활비로 근근히 버틴다. 그마저도 주로 책사는데 돈을 쓴다. 빽다방 라떼가 2500원에서 3000원으로 오르면서 그마저도 끊었다. 옷이나 신발 등 나를 위해 무언가를 사는 일도 퇴사와 함께 아예 멈췄다. 내 패션은 2년 6개월전 그날에 멈춰 있다.


퇴사와 동시에 인간관계가 모두 끊어져 그나마 나갈 일이 없다는 사실이 외려 다행으로 느껴질 정도다. 매년 한번씩은 떠나던 가족 여행도 사라졌다. 마침 코로나 팬데믹이 터져, 속으로는 얼마나 다행이다 싶었는지 모른다. 아이에게 그럴듯한 핑계를 댈 수 있었으니까.


현실이 개입하는 순간 마흔 중후반의 퇴사 라이프는 순식간에 잔혹동화가 된다.


솔직히 퇴사를 하던 시점에는 1년 이내, 아니 3개월 이내면 새로운 기회가 생길 것이라 확신했다. 16년간 한결같이 일해온 나름의 분야(조직문화, 육성)도 확실했고, 대학원 학위도 받았다. 그렇게 3개월, 6개월, 1년이 흘렀다.


회사가 싫어서, 체질에 안맞아서 굳은 결심으로 나왔음에도 퇴사 초반 헤드헌터들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다. 못이기는 척 제안에 응해 면접도 봤다. 세번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며 조급증이 생기기도 했다. 이러다가 평생 백수로 늙는 것은 아닐까?


그 불안감을 오롯이 혼자 안고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니면 내가 미처 보지 못한건지 와이프와 아들은 별다른 걱정없이 평온을 유지했다. 참 특이한 가족이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퇴사를 결정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 회사 그만 둘까봐."

"그래! 언제 그만둘건데?"


처음 퇴사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순순한 허락(?)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다.


"장난 아닌데?"

"진짜 못다니겠으면 그만 다녀야지. 잘 생각했어."


그렇게 3년을 끌고 나는 비로소 퇴사를 했다. 사실상 아무런 준비도 없이, 대책도 없이, 퇴직금으로 먹고 살면서 생각해보자는 심정이었다.


준비없는 퇴사는 명백한 도박이다. 보통 멘탈이라면 1년 아니 6개월도 버티지 못할지 모른다. 2년 6개월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가족들의 이해와 이미 되돌아갈 다리는 불타버렸다는 배수진의 각오였다.


세번째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1년 6개월 전쯤의 겨울, 나는 사람인, 리멤버의 이력서를 삭제했다. 재취업을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원했던 스토리텔러의 길만 묵묵히 걷기로 마음을 굳혔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읽고 쓰는데 썼다.


오늘, 여전히 나는 백수다. 그리고 돈에 관한한 내 생활은 잔혹동화에 가깝다.


여전히 빈털터리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조금 더 많다. 작년 겨울, 몇 차례 도전끝에 책을 출간하고 작가가 됐다. 그 어렵다는 투고를 뚫었다. 한때 책한권만 내면 내 막힌 인생이 뻥 뚫릴 것이라 믿기도 했지만 이내 겸손해지기로 했다. ISBN만 있으면 작가로 등록 가능한 네이버 인물정보 등록도 미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작가라 불리기엔 한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염치가 없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한 권 더 낼 때까지 미루기로 했다. 아니 세권, 네권, 다섯권 그렇게 계속 책을 내기로 했다. 작가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도록. 그렇게 백수의 하루는 종일 읽고 쓰는 일로 채워졌다.


더위가 한참인 7월의 어느날, 두번째 책을 계약했다. 이번엔 복수로 출판사가 붙었다. 나는 감사하게도 그 중에 한 곳을 고르는 행운을 누렸다. 11월이면 두 번째 책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작가라는 타이틀에 부끄러움이 없을까?


상반기에는 장편소설을 써서 공모전에 참가했다. 무려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이다. 결과가 무엇이든 이 과정을 통해 성장했다고 믿는다. 안되더라도 내년에 또 도전할 것이다. 거기에 또 하나 공익광고공모전에 인쇄광고를 만들어 출품할 예정이다.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도전해오는 취미 아닌 취미가 됐다.


이 과정은 처참한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새롭게 관점을 보는 창의력, 끈기라는 없던 가능성을 심어주었다. 작년엔 7수끝에 무려 본선에 진출했다. 고대하던 본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그 또한 어떠하랴. 나는 한뼘 더 성장했는데. 올해 또 도전을 준비중이다.


지난한 2년6개월, 불안함의 연속일 수 밖에 없던 백수의 시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으로 충전할 수 있었다. 나를 믿어준 가족, 미래에 대한 확신, 마흔 중반에 회사를 때려친 일생일대의 결단은 나를 게으름에서 건져내어 주었다. 여전히 돈 한 푼 못버는 백수 신세이지만 2년 6개월 전의 선택이 옳았다고 자신하는 이유다.


마흔 중후반의 백수가 쓰는 동화의 결말이 어떨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아름다운 결말이 될지 정말 잔혹동화가 될지 알 수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이 그득하니 즐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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