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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ul 02. 2024

신입의 직격(格)

프롤로그

지금 나이 마흔여덟,

2003년 스물일곱에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니

신입 시절은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이 됩니다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 그 느낌만은 바로 어제일 처럼 선명하네요


2002년 월드컵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던 그 해 졸업을 했어요

토익이니 학점이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1년이 넘도록 취업을 못하고 있었지요

노환으로 자리에 누우신 할머니를 돌보면서

뒤늦은 토익공부를 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듬해 여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더위가 가시기 시작한 가을쯤 운 좋게 취업이 됐습니다

살갑고 헌신적인 손자는 아니었지만,

마지막까지 당신을 돌봐준 할머니의 선물이었을까요?


회사는 경기이천 부발읍에 위치해 있었어요


현대전자가 여러 갈래로 쪼개지면서

반도체 전공정 사업부(설계)는 지금의 하이닉스가 되었고

후공정 사업부(조립, 테스트)는 미국계 회사가 되었지요


저는 바로 그 미국계 반도체 회사에 입사했고

인사총무 업무를 맡았습니다


최종 면접을 마치고

퇴근 시간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오던

삼성동 테헤란로의 거리와

막 해가 저물면서 만들어낸 주황색 노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서울에 살면서

경기도로 출퇴근을 하게 될지 생각도 못했지만

서울 전역에 출퇴근 셔틀이 있어서 아침잠만 조금 줄이면

그럭저럭 다닐만했습니다


사실 취업을 영영 못할 줄 알았는데,

이게 어디냐? 감지덕지

감사한 마음으로 다녀야지 싶었지요


원래 술이 약한 편은 아닌데,

신입사원 환영회에서 대차게 뻗은 흑역사가

먼저 떠오릅니다


1차로 하이닉스 단지 정문 앞 횟집에서

빈속에 소맥 10잔 정도를 거푸 받아마셨죠

팀 선배들 숫자대로 받아 마신 셈입니다


호프집으로 2차를 가서 양주를 섞은

폭탄주를 마시고는 그대로 엎어졌죠

(뒤늦게 전해 듣기로는 맥주에 바카디를 섞었다고 했습니다)


의식은 그대로인데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

"괜찮아?"

라는 주변의 말이 메아리처럼 들리고

누군가 내 뺨을 치고, 둘러업고, 어디론가 질질 끌려가던

상황이 고스란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지독한 갈증에 눈을 떠보니 처음 보는 낯선 곳이었습니다

무작정 문을 열고 나와 물을 찾아 돌아다녔지요

복도 끝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시고는 정신을 차려보니

어디서 나왔는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러닝에 바지만 입고 1층부터 4층까지 건물 전체를

돌아다녔습니다

날은 춥고, 취기는 여전하고 에라 모르겠다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가

"저 신입사원인데요? 방을 잃어버려서.."

라고 말하고는 빈 침대에 누워버렸습니다


아침이 되고, 한바탕 소동이 일었어요

저를 기숙사에 데려갔던

과장님이 신입사원이 실종됐다며 찾아 나선 것이죠


그곳은 하이닉스 단지 안에 있는

기숙사였습니다


20년도 더 된 신입사원 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게 만든 웃픈 에피소드랄까요?


그 후 17년간 HR분야에 일을 하면서 

매년 신입사원 교육, 워크숍등을 도맡아 진행했지요


어찌 된 일인지

막상 현업에 있을 때는

신입 그 당시의 느낌이라던가 마음가짐 따위를 몽땅 잊고

지극히 지루하고 와닿지도 않는 허튼소리만 지껄이지 않았나

뒤늦은 후회가 들었습니다


20년 전 신입으로 돌아간다면,

그때의 어리바리 아무것도 모르던 나를 본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나

지금 알게 된 것을 상세히 알려준다 해도


현재 처한 어려움을 부른

실패나 실수를 얼마나 줄일 있을지,

지금의 내가 주는 조언은 온전하고 쓸모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때의 나라면

결정적 순간,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는 그 순간

누군가 턱 나타나

이땐 이렇고 저땐 저런거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게 어때?

라고 말해준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곰곰히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그렇게 하나 둘 해줄말을 정리 하다 보니

몇 가지 주제로 묶이더군요

우선,
'나 자신을 제대로 알고 정체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자기인식의 메시지를 담은
直(곧을직)격

'타인을 이해하고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 함께 성장해야 한다' 사회관계의 메시지를 담은
織(짤직)격

'내 분야를 찾아 최고의 실력을 갖추기 위해 최선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전문성의 메시지를 담은
職(직분직)격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격을 완성한 후 다른 방식으로 깨부수어야 한다' 창의성의 메시지를 담은
波(깨뜨릴파)격

신입이 지켜야 할 네 가지 格 이라는 의미에서

'신입의 직격'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21년 전,

러닝과 바지만 입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기숙사 건물 전체를 오르내리던 어리바리 신입 시절의

나 자신을 다시 만난다는 마음으로

진정성을 담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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