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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난한 Dec 07. 2023

불법 침입죄로 신고합니다. 고난 씨, 절망 님_고수전

평범한괴식일기

강가의 조약돌처럼 다른 모양과 색, 크기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붙어 사는 이곳에서 고난 없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모두가 공감한다고 생각한다. 고난은 참 예의가 없다.


어딘가의 누군가는 운에도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불행이 왔다면 그를 상쇄할 운은 이미 다른 곳에서 할당을 다했거나 더 큰 행운이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도 말한다. 그 이론에 대해 수긍하는 한편,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잼 바른 식빵이 항상 잼 쪽으로 떨어지는 일과, 지각을 앞두고 엘리베이터가 나를 두고 출발하는 일 그리고 평일 약속이 있는 날에 꼭 몰리는 잔업과 같은 사건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불쑥 내 일상에 침범하는 이 불청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가스 점검도, 아파트 설문조사도 하다못해 스위치 게임 <동물의 숲>의 주민까지 방문 시간에 대해 미리 통보라도 해오는데 말이다.   

  

인내심과 집요함이 부족한 나지만 그럼에도 글쓰기만은 멈추지 않고 있다. 단어를 끄집어내어 문장으로 엮고 다듬는 일이 과정은 고돼도 값지고 의미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의지가 단번에 쓰러진 일이 있었다. 여 한 달간 작업하던 소설 하나를 예상치 못하게 아주 보내주게 되었다.   

  

나는 유독 기계들과 사이가 돈독하지 않은데 재작년의 장만한 데스크탑 역시 썩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 2년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녀석이 부린 말썽을 생각하면 분명했다. 자주 멋대로 전원이 꺼져버렸으니 말이다. 이번에도 녀석은 블루스크린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했고 나의 재량으로 녀석을 받아주기 어려워 컴퓨터에 능한 친구를 용병으로 고용했다.


친구의 처방은 결국 백업이었다. 기계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고, 결국엔 시스템적인 문제일 수 있으니 아예 지워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USB에 자료를 넣고 더불어 윈도우 백업 역시 이 USB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고난이 멋대로 내 일상에 무단 침입을 해온다.     


백업을 완료하여 컴퓨터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것을 확인해 그때의 나는 USB를 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USB의 내용물까지 백업 때에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명백한 주거침입죄다. 고난이 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막무가내로 난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에 함부로 뛰는 나의 심장 박동을, 다시 드라이브 창을 껐다 킬 때에 후들거리는 손가락을 잊을 수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글은 구글 드라이버에 업로드해왔지만 그때에 가장 최근에 작업하던 글들은 결국 아주 보내버리게 되었다.     


멀쩡히 그날의 하루를 보내줄 수 없었다. 냉장고 속 또다른 나의 친구, 알코올을 꺼내들고 반주로 곁들일 괴식 축제의 막을 올렸다. 이전에 마트에서 호기심에 사두었던 고수, 그리고 칵테일 새우를 보고 나는 요리를 시작했다.


무려 ‘고수전’을 말이다.     

고수전의 레시피는 주재료가 고수인 것을 제외하면 여느 평범한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아래의 레시피를 유의 깊게 보지 않아도 좋다고 미리 경고하고 싶다. 섣부르게 방문해준 그때의 고난 씨는 아직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료 : 고수 200g, 계란 2개, 칵테일 새우 200g, 홍고추 1개, 파, 소금 1/2T, 부침가루 100g     


1. 고수를 손마디 크기 만들 자른 후, 칵테일 새우 일부를 잘게 으깨준다. 홍고추 한 개 또한 미리 썰어둔다.
 

2. 큰 볼에 부침가루 100g, 손질한 고수와 으깬 칵테일 새우, 통 칵테일 새우, 홍고추, 소금 1/2T와 계란을 넣는다. 물 반 컵 정도 넣고 섞는다.     



3.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일정 열이 오르면 약불에 두고 반죽을 올린다.     




위에서 경고한 것처럼 꽤 그럴듯한 외양의 요리지만 고수전 또한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자기 자신과 일정 시간을 함께 보내며, ‘나’를 견디고 맞추고 달래온 우리 어른들은 정해놓은 자신의 모습이 있다. 그것이 바라는 이상향이든, 과거의 경험에서 겨우 조율하여 도출한 모습이든 말이다.


난 나를 ‘향신료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정해왔다. 과거에 나는 다른 강한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들을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수전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미처 목구멍으로 그것을 넘기지 못하는 자신을 마주했다.


고수 특유의 향이 음식을 느끼는 감각 기간인 입과 코가 아닌, 눈에서 느껴졌는데 그 순간 나는 고수에게 강한 혐오감을 생전 처음으로 가지게 되었다. 놀랍게도 고난과 절망이 내 일상에 들이 닥쳐온 이유를 깨닫게 된 건, 그때였다.     


아하, 다시 한번 ‘나’와 견주고 맞출 그때가 왔구나. 고수전의 실패로 내가 향신료를 ‘적당히’ 좋아하는 사람인 것을 깨달은 것처럼, 내가 썼던 글을 다시 쓸 수 있는 사람인지 ‘나’와 다시 한번 절충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결국 입에 넣었던 고수전을 삼켜내고 결심한다. 이전보다 더 마음에 차는 글을 써야지. 고난 씨가 손 써둔 일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다짐뿐이라서 먼저 고수전을 삼켜낸다. 고난 씨의 예고 없는 방문 소동은 덕분에 또다른 소동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때, 장소 구분 없이 함부로 방문하는 일은 역시 거절하고 싶은데, 남은 고수전의 처리가 매우 어려워서이다. 따라서 남은 고수전의 행방은 묻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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