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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심 Sep 11. 2022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아르바이트였다

알바로 장식된 나의 대학시절


사실 자라면서 딱히 경제적인 궁핍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형편이 넉넉했던 적도 없다. 어쩌면 시골에서 나고 자라며 상대적 결핍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이 때문인지 커서 돈이 부족해 온갖 알바를 다 해봐도 경제관념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았다. 돈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부모님이 또 동네 사람들이 증명해줬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의 알바들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분식집 배달 알바


인근 도시에서 혼자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2000 대입 수능시험을 망치고 곧장 짐을 싸서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오랜만에 엄마 아빠와 함께 밥을 먹는 것만으로 좋았다. 밥을 먹으며 시험을 한번 더 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했다. 아버지가 나지막이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 머리가 그 머리지!”

이 말을 반찬과 함께 한참을 곱씹었다. 위로는 못할망정 고춧가루를 뿌리시다니. 틀린 말은 아니. 한해  준비한다고   친다는 보장도 . 그리고 재수학원 하나 없는 시골에서  년을 보내며 시험 준비를 한다고  나아질 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수능을 망친 이유를 컨디션 난조라고 자체 판단했던 나는 엄마의 밥상과 고향 마을의 푸근함이라면 해낼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래도 아버지의 한마디는 참기 힘들었다. 다시 짐을 싸서 집을 나와 내가 다닌 고등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 집으로 무작정 갔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친구 집에 빌붙어 지내며 분식집 알바를 시작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부족할 판에 알바를 하기로  것은 조금 충동적이었다. 뭔가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나의 본능적인 선택이었던 것일까?


분식집 일은 배달 일이 대부분이었. 스쿠터를 타고 철가방에 음식을 날라야 했다. 배달이 없을 때는  서빙과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   50 원에 매일 12시간을 주말도 쉬지 않고 꼬박 일했으니 노동착취였다. 시청 근처에 자리 잡은 분식집은 장사가 잘되었다. 돌솥 6개를 철가방에 넣고 엘리베이터 없는 법원 건물 5층에 배달했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돌솥을 취급하지 않는 중국집 배달이 부러웠 정도다. 길바닥에  먹고 내놓은 음식 그릇을 수거할  특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쭈그리고 앉아 손을 더럽히지 않고는 그릇들을 수거통에 담을  없었다. 간혹 깨끗이 씻어 내놓은 그릇을  때는 감동을 받기도 했다.


3개월간의 알바는 내 마음을 다잡는데 충분했다. 공부하는 게 쉽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집으로 갔다. 번 돈이 있으니 문제집 사느라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되었다. 교재를 사고 남은 돈으로 갖고 싶던 MP3 플레이어와 인라인스케이트, 그리고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샀다. 알바하는 내내 마음 한구석으로 내가 왜 대학에 가야 하는지 생각했다. 딱히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안 가고 잘 사는 사람이 내 주변에 너무 많았다. 배달일 하기 싫으면 대학을 가야 한다는 식의 각성도 없었다. 또 대단한 이유가 필요한 것 같지도 않았다.


3개월의 알바가 자양분이 되었는지, 엄마의 밥과 고향 마을의 편안함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시험을 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형편에 서울로 학교 간다고 말하니, 길 가다 만난 초등학교 때 은사님은 뭣하러 부모 고생시키냐 핀잔을 줄 정도였다. 그때는 야속하게 들렸지만 틀리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다행히 학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8학기 동안 70% 등록금 감면을 받게 되었다. 그 덕에 마음이 좀 놓였다. 하지만 학점 3.5를 넘겨야 한다는 장학 조건이 내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대학 1, 2학년 놀기 위해 했던 알바들


다행히 서울에 누나가 일을 하고 있어 함께 지내게 되었다. 아주 적은 용돈으로 지내며 난생처음으로 궁핍을 느끼게 되었다. 학생식당에서 밥만 먹어도 용돈은 금방 없어졌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재미있는 것도 너무 많았다. 재수할 때 잠시 했던 알바의 교훈은 빠르게 휘발되었다. 특히 여자 친구가 생기면서 내 씀씀이는 더욱 커졌다. 놀기 위해 알바를 하지 않고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몇 가지 기억나는 알바들

공덕동 99 피자집: 반죽부터 피자 굽기까지 완벽 마스터, 치즈의 맛을 알게 됨, 오토바이로 배달

송파에 있는 보습학원강사: 중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쳤다.

신촌 부근 방문 손세차: 이게 정말 이색 알바. 걸레와 물통을 들고 이른 아침 아파트 단지 곳곳을 다니며 매달 정액요금을 낸 차를 닦는 것이다.

학교 도서관 사서: 대학교 도서관에서 근로 장학생


입학하고 첫 학기를 보내고 받은 학점은 3.48. 좌절이었다. 3.5를 넘기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뭐라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3백만 원을 훌쩍 넘기는 돈을 다음 학기에 내야 했다. 그래서 절치부심하여 다음 학기는 3.5를 간신히 넘겼다.


하지만 2학년이 되어서 온갖 알바로 뺏기는 시간. 여자 친구와 노는 시간. 어려워지는 공대 공부. 늘어가는 동아리 활동. 학점이 2점대를 맴돌았다. 두 학기 연달아 장학금이 날아갔다. 끝내 학비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휴학을 하기로 했다. 사실 학비 부담보다 부모님께 면목이 없었다. 장학생으로 학비 부담을 덜겠다던 나의 호기가 무색해졌기 때문이다. 또 마침 누나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던 것도 한 몫했다. 그 당시는 알바 때문에 학업에 지장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나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휴학, 경제적 독립을 위한 공공근로 알바


휴학한 뒤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다음 학기 학비는 벌어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있으면 방세가 나가므로 시골집으로 내려오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시골은 일자리가 흔치 않았다. 어쨌든 목표는 다음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버는 것이었고 왠지 부모님에게 더 이상 손을 벌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커서 집안 형편을 보니 느끼는 바가 있었나 보다. 그리고 뉴스로만 접하던 농가부채 이야기가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란 걸 안 것도 한 몫했다.


운 좋게 하게 된 일은 면사무소 공공근로 알바였다. 적은 돈이었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보람 있었다. 공공근로의 일환으로 동네 어른을 모아놓고 면사무소 옆에 마련된 컴퓨터 실에서 컴퓨터 사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 면사무소에서 내 사정을 알고 단기 알바로 도로 측량, 지도 그리는 일, 사업체 규모 조사 등을 간간히 알선해줬다.


저녁에는 고등학생을 모아 그룹과외를 했다. 과외를 시작하고 깨달은 것이 많다. 가르치면 배우는 능력이 향상된다는 사실. 말로만 들었지 해보니 정말로 도움이 되었다. 또 어떤 알바보다 편했다. 왜 여태껏 과외를 할 생각을 안 했을까. 아마도 과외를 받아보지 않아 과외를 어떻게 하는지 몰랐던 것이 큰 이유였다.


호기롭게 시작한 휴학기간이 금방 끝났다. 등록금은커녕 한 학기를 버틸 생활비와 방세를 간신히 모아 상경했다. 그리고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로 충당하기로 했다. 결국 정부의 힘을 빌어 비로소 경제적 자유를 달성한 셈이다.



편의점 새벽 알바, 토익 950점


3학년 복학을 앞두고 자취방을 구했다. 학교 부근은 너무 비싸 지하철로 한 시간 좀 넘게 걸리는 수도권의 한 도시에 방을 얻었다.


학기 시작 전까지 세 달 정도 남았는데 뭘 더 해볼까 궁리하다 편의점 알바를 구했다. 새벽타임에 하는 알바는 사람과 크게 부대끼지 않아 나쁘지 않았다. 졸음만 참으면 되었다. 휴학하고 이렇게 여행 한번 안 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3학년으로 복학하자니 두려움이 밀려왔다. 수업을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전공서적을 구입해 선행학습을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래서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마음을 다질 겸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에 손님이 없는 틈타 미리 출력해온 영문 기사 세 개를 매일 읽었다. 처음에는 뭔 소리인지. 모르는 단어도 너무 많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습관이 드니 읽기가 편해졌다. 단어를 찾지 않고 문장의 성분을 쪼개며 쭉 읽었다. 알바가 끝날 때쯤에는 집 책상 위가 기사 출력물로 가득 찼다.


이렇게 시작된 작은 습관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알바 덕에 만들어진 습관으로 토익공부 한번 하지 않고 졸업할 쯤에 900점을 훌쩍 넘겼다. 2학년 때 700점을 간신히 넘겼던 것을 생각하면 기적이었다. 내가 헤커스에 몰래 다닌 것이 아니냐고 친구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만도 했다. 암튼 이때 편의점 알바로 들인 습관이 이룬 작은 성취는 내가 평생 꾸준함에 집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대학 3, 4학년 학업에 집중하게 해 줬던 과외 알바, 그리고 대학원 진학


한 시간 넘는 통학거리에 학과 공부를 하면서 별다른 알바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어렵게 이룬 독립을 종속으로 바꿀 수 없었다. 다른 것은 힘들어도 과외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전단지를 만들어 돌렸다. 다행히 자취하는 곳 부근이 대학교와 멀어 경쟁이 심하지 않았다. 과외와 학업을 병행하며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10년도 더 된 오토바이를 구입했다. 최소 과외 3개는 해야 월세와 최소 생계비가 충당되었다.


석사 2년 포함 4년을 탔다
특별했던 오토바이를 얼마 전 캔버스에 그려봤다.


한때 과외가 늘어 한번에 5개를 하면서 전공 24학점을 듣는 무모함을 보였던 적도 있다. 이때가 내 효율의 전성기였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그 당시 여자 친구였던 나의 아내는 왜 자기를 만나고부터 내가 더 열심히 사는지 못마땅하다고 말했을 정도다. 알바가 학업에 지장을 줄만 해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예상과 달리 공부가 더 재미있고 수업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비록 정부의 힘을 빌어 경제적인 독립을 이뤘지만, 내 돈으로 학교를 다니는 효과는 학업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큰 변화를 줬다. 과제를 할 때는 절대 소스(족보)를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왠지 돈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과제를 하는데 시간이 두배로 들었다. 시간 절약을 위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에 수업 과제를 해야 했다. 학점은 1, 2 학년 때보다 훨씬 좋았고 알바 때문에 학업에 지장이 있다는 것은 맞지 않고 나의 마음자세가 중요하단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학업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졸업을 한 뒤에도 공부가 계속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지방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학비가 들지 않고 기숙사를 제공하고 생활비를 준다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부족한 생활비는 알바로 충당했다. 여러모로 당장 취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할 판이었다. 학자금 대출 천만 원과 바로 한 살 위 형에게 빌린 천만 원. 내가 쉬지 않고 알바를 했음에도 대학 졸업 후에 그 정도 빚을 떠안았다. 학자금 대출은 분할상환이고 형 돈은 떼먹을까 생각을 했었다. 돈에 쪼들려도 이상하게 돈을 빨리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경제관념과 돈에 대한 생각은 조기교육이 중요한가 보다.



취업 그리고 유학


석사를 마친 뒤에 바로 취직을 했다. 취직도 수단이었다. 5년 넘게 만난 여자 친구와 결혼해야 했고, 2천만 원의 빚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이 모든 사정을 석사 지도교수님께 얘기하니 ‘걱정 말고 박사 진학하라고 자신이 1억 정도 변통해줄 수 있다’라고 말씀해주셨다. 교수의 말에 감동받아 여러 날 망설였다. 그렇지만 폐 끼치고 싶지 않아 회사에 입사하는 것을 선택했다.


회사생활을 하며 대출금과 형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고, 결혼도 했다. 지방에 있던 회사는 기혼자 숙소를 제공해서 돈을 모았다. 취직을 수단으로 생각했던 게 맞았는지, 돈을 벌 이유가 다 해소되자 딴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나에게 1억을 제안했던 교수님께 돌아갈 생각을 했다. 나만큼 대책 없는 아내는 뜻밖에 나에게 해외유학을 권했다. 그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31살, 조금 늦은 나이에 미국으로 박사 유학을 떠났다. 빚 갚고 남은 몇천만 원을 들고 박사과정 지도교수가 약속한 학비와 생활비 보조만 믿고 용기를 냈다. 회사를 다닌 지 꼭 2년 반 만이니 회사 입장에서는 먹튀라고 볼 수 있겠다.




나의 대학생활은 여러모로 알바가 큰 역할을 했다. 나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은 친구들이 많기에 나의 알바는 사치로 보이기도 했다. 공부를 관두고 언제라도 내려가면 따뜻하게 맞아줄 건강한 부모도 있었다. 알바 경험은 나에게 자양분이 되었고, 내가 학업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르게 하도록 큰 도움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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