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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왕 May 12. 2023

서울촌놈 하경기

지방으로 전학온 낯선 이방인

안양 평촌으로 이사 온 나는 모든 것에 적응하는 게 힘들었다. 우리 집은 그 당시 BBQ 치킨 가맹점을 오픈해서 치킨 장사를 하기 시작했고, 일에 치여서 몹시 바빴던 부모님은 나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 당시 부모님이 힘들게 하루 종일 치킨장사와 배달을 열심히 하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안쓰럽지만 창피하기도 하고 보기 싫었다. '부자였던 우리 집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왜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진 것일까?' 나는 정말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서울촌놈입니다. 


그 당시 나는 평촌에서 사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일반적으로 서울에만 거주했던 사람들은 서울을 벗어난 도시는 전부다 '촌 동네'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서울 사람이라면 공감). 나 역시 '평촌'이라는 이름처럼 '평촌 촌동네', '평촌 촌놈들'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고,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 없었다(물론 객관적으로 평촌은 1기 신도시로 굉장히 살기 좋은 동네입니다).



전학 온 내게 더욱 괴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던 에피소드가 있다. 하루는 학교에서 서울 근교로 수학여행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선생님은 관광버스에 앉아있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선생님 : "애들아 지금 저기 밖에 보이는 게 한강이야. 어때? 신기하지?"


친구들 : "와! 진짜 너무 신기해요. 한강 처음 봐요. 대박! 저기 63빌딩도 있다."


당시 나에겐 친구들의 반응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어린 마음에 "우리 집 근처에서 매일 보는 게 한강이고 63빌딩인데, 왜 저걸 보고 그렇게 신기해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정말 먼동네로 이사 왔구나 싶었다. 그래서 더욱 내가 사는 이곳이 싫어졌다.



타 지역으로 전학 오니 기본적인 생활패턴, 말투, 패션, 환경 등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이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완벽한 서울촌놈이었다. 화려한 고층건물, 값비싼 외식, 명품신발, 명품옷, 가사도우미 아줌마 등... 예전에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스스로 마치 낯선 타지에서 온 이방인처럼 생각하고 이방인처럼 행동했다. 이것이 내 어린 자아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나름 공부를 잘했던 나는 전학 오고 나서 급격하게 학업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생업에 바빴던 부모님이 나를 케어할 시간이 부족하셨던 까닭이다. 서울에서 줄기차게 받았던 개별 과외와 학습활동은 모두 끊기게 되었고, 고삐가 풀어진 나는 마음껏 뛰놀기 시작했다. 전학 온 학교도 동네도 모두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부모님은 내가 어떤 성적을 받아오더라도 나무라시지 않았고, 정확히 말해서 먹고사는데 외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바닥까지 떨어진 성적과 자존감


이제 나는 과거 서울에서 먹고 자라고 서울만 알았던 '서울촌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리 집은 더 이상 부유하지 않았고, 이곳에 와서 뭐 하나 특출 나게 내세울 것이 없었던 나는 점점 자신감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성격 또한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우리 집에서 거리가 꽤 멀었다. 그래서 동네에는 친구가 없었고 방과 후 더더욱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부모님은 생업에 종사하느라 거의 만날 시간이 없었고 대화할 사람이 없었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특별히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없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굉장히 자유로웠지만 외로움 또한 점점 밀려왔다. 여의도 시절이 그립고 같이 어울렸던 친구들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과거로 되돌아갈 순 없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이미 내성적으로 되어버린 내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방과 후 축구를 하면서 몇몇 친구들을 사귀긴 했지만 정말 친하게 지내는 절친은 거의 없었다. 내 마음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고, 남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렵고 버거웠다. 설령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친구들이 있어도 냉담하게 대했다. 그 당시 자신감과 자존감이 바닥이었던 나는 잘못된 자의식이 생겨났고, 종종 내가 사는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곤 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정체성은 내 삶을 점점 지배하고 갉아먹기 시작했다.



암울한 세상에서 게임은 나의 유일한 기쁨이자 탈출구였다. 나는 오락실과 PC방, 콘솔 게임 등 다양한 게임을 즐겼다. 심지어 방학 때는 거의 1달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 폐인생활을 하기도 했다. 공부는 안 하고 맨날 게임만 하니, 중학교 때도 역시 내 성적은 항상 최하위권을 유지했다. 하지만 나는 성적이 바닥을 찍거나 말거나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정확히는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공부를 해야 하는 동기부여를 찾지 못했다. 그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집안형편, 이사 후 새 출발을 꿈꿨지만...


부모님은 정말 열심히 일하셨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우리 집의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고, 치킨집 장사는 큰 수익을 남기지 못했다. 결국 우리 집은 치킨집 장사를 접고 당구장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큰 손해만 보게 되었다. 이후 아버지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새롭게 취득하셨고, 수원에 부동산을 새로 오픈했다. 결국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무렵에 우리 집은 안양 생활을 청산하고 조그만 수원 집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



사실 나는 중학교 내신성적으로만 치자면 실업계고에 진학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수원은 평준화 지역이었고 1지망으로 기재했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수원에서, 아니 그 당시 경기도 전역에서도 유명한 전통의 명문고였다.



수원으로 이사 오고 나서 나는 암울했던 과거를 모두 청산하고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좋은 대학에 꼭 가야 한다는 목표의식은 없었지만 학생으로서 공부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공부를 다시 하면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이 학교는 내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게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지만, 입학 첫날부터 나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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