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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Sep 24. 2024

단테의 별 - 1권 1부 12화/목차누락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무슨 감정일까? - (10)

여름태풍의 명성에 걸맞게 비바람이 거셌다. 문승협과 문현아는 이틀 동안 꼼짝없이 방 안에 갇혀있었다. 밀린 방학숙제를 하며 무료함을 달랬다. 태풍이 물러가니 이번엔 태양이 심술부렸다. 태풍에 밀려있던 태양이 한풀이하듯 대지를 지글지글 끓였다. 오후 다섯 시 햇볕 또한 숨 막히게 뜨거웠다.

할머니 박옥춘이 여직원을 대동하고 시장에 갔다. 문승협남매는 선풍기바람으로 더위를 쫓으며 책을 읽다 졸았다. 아래층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 자연누나.”

“뭐 하냐?”

“그냥 책 읽다 졸았어요.”

“현아는아?”

문현아는 배를 들어내놓고 이마와 코에 땀이 송송 맺힌 채 잠들어있었다. 이자연이 냉장고에서 얼음 몇 개를 꺼내 수건에 쌌다. 문현아옷을 내려 배를 덮어주고 팔과 다리를 닦았다. 차가워진 수건을 접어 이마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문승협은 이자연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눈웃음을 다시 보았다.

“누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여시내 여시, 으째 알았냐?”

“누나의 그 선한 미소가 말해주네요.”

“아따 부끄럽게시리, 뭔 그런 소리를 다하냐. 근디, 내가 좀 이쁘긴 해잉?”

“하하, 네,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뭐시냐, 그, 윤두조가 찾아왔었어야.”

“윤두조가요?”

“잉, 그동안 괴롭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드라, 다신 안 그러겄다고 다짐도 했어. ”

“다른 말은 없었어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강요하믄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나 어쨌대나. 싫은 걸 강요하는 게 고문인지 몰랐다믄서, 방법이 잘 못된 걸 이제사 깨우쳤대. 근디, 좋아하는 건 지 마음인께, 그것까지는 막지 말라드라. 인자부터는 상대가 바랄 때 원하는 방식으로 좋아할 거라고, 사랑해서 헤어진다라는 말도 있다고, 꼭 삼류소설주인공멘키로 질질 짜믄서 그러드란께.”

문승협은 자신이 했던 말을 인용한 윤두조가 웃기긴 했지만, 이자연이 삼류소설 주인공대사로 치부해 뻘쭘하였다. 그러나 윤두조가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에 놀랐다. 무엇보다 선한 미소를 되찾은 이자연을 보고 기뻤다.

“양아치로 소문난 윤두조가 그랬다니, 안 믿기네요. 누나 말이 사실이면, 양아치가 아닌 순정파네요 순정파.”

“음마, 모른 체끼 할래?”

“뭐를요?”

“알았다 알았어, 내가 모른 체끼 해주께. 근디, 너도 소설 그만 봐라잉.”

“소설? 소설은 왜요?”

“어허, 왜요는 일본요란께는.”

“하하, 뭐 갖고 그러는 건데요?”

“알았어, 그렇다 치자. 근디 어리게만 봤드만, 승협이가 쪼까 멋진디? 잉, 멋져 부러.”

“어찌 됐든, 나는 누나미소를 다시 봐서 좋아요.”

“아따 그 미소라는 말 좀 그만 하란께, 얼굴에 경련 온다야.”

“미소, 미소, 미소.”

“호호, 연설하네 진짜. 그라고, 우리 엄니가 저녁에 와서 밥 먹으란께, 여섯 시쯤 현아랑 같이와.”

“그러면, 누나가 할머니한테 말해서 우리 좀 데리고 가요.”

문승협이 몰래 이자연집을 찾아갔다 돌아왔을 때, 모두 잠들어있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안심했었다. 할머니가 어떻게 알았는지 다음날 여직원과 문현아까지 앉혀놓고 혼냈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자연에게 피해 갈까 봐, 낚시했던 곳에 물건 찾으러 다녀온 거라고 얼버무리며 거짓말했었다. 할머니에게 이자연집에 간다고 직접 말하면 왠지 못 가게 할 것 같았다.

문현아가 울먹이며 잠에서 깼다. 이마에 얹힌 수건은 아랑곳없이 다짜고짜 이자연에게 안겼다. 이자연은 이유를 묻지 않고 그냥 안아줬다.

“언니, 엄마 꿈을 꿨는데, 무슨 꿈인지 생각이 안 나.”

“꿈은 다 그래야, 눈떠불믄 사라지는 게 꿈이어. 방학이라 엄마랑 떨어져 있어 갖고, 많이 보고 싶었는갑다.”

문승협은 이자연에게 안겨 훌쩍이는 문현아를 바라보았다. 엄마를 못 본 지 반년이 됐다는 생각에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이자연에게 엄마랑 떨어져 산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마침 할머니 박옥춘이 여직원과 시장에서 돌아왔다. 이자연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저녁 먹여 잘 데려오겠며 승낙받았다.

문승협은 뭔가 이룬 것 같아 기분 좋았다. 이자연과 손을 잡고 따라가는 문현아도 덩달아 즐거워했다. 이자연집에 다다르자 저번에 봤던 니나놋집누나들이 술집 앞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웠다.

“음마, 자연이 딸이냐? 이쁘게 생겼다잉.”

“아따 별말을 다하요, 이렇게 이쁜디 내 딸이겄소?”

“옆에 총각은 애인이제? 얼마 전에 너 찾아왔드만.”

“호호호, 나보다 무자게 젊은 애인인께 부럽지라?”

“잉, 허벌나게 부럽다야. 지금은 어린 남자애인이 택도 없는 말인디, 또 아냐, 훗날엔 연하남 연상녀 해갖고 유행 탈란가?”

“언니, 제발 그때까지만 사쑈.”

“보소, 자연이 젊은 애인, 화장 안 했다꼬 내를 몰라 본갑지?”

“아 안녕하세요.”

문승협은 애인이라는 말에 쑥스럽기도 했지만, 여기 왔던 걸 문현아에게 들킬까 봐 모른척하고 있었다.

“어이 서울총각, 자연이 보다는 내 가슴이 더 큰디, 혹시 나한테 올 맘은 없는가?”

“아따 참말로, 뭐라 하요 진짜. 승협아, 귀 틀어막고 언능 가자잉.”

“오빠 저 언니 왜 저래? 왜 오빠보고 자연언니 애인이래? 저 언니 알아?”

“몰라, 그냥 장난치는 거야.”

문승협은 이자연가슴에 안겼던 순간이 생각나 얼굴이 불그레 상기되었다. 내 오빠는 내가 지킨다는 질투 어린 문현아질문을 대충 넘겼다.

“오메 울 애기들 왔는가.”

“안녕하세요.”

“잉, 잘 있었냐. 자, 여그 안거라. 더운디 오니라 고생했제?”

이자연어머니가 생선구이와 떡갈비 등 진수성찬을 차려놓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들 위주였다. 문승협남매를 식탁에 앉히고 대접에 얼음을 띄워 가져왔다.

“더우믄 입맛 없은께야, 일단 시원한 물 한 모금 축이고 밥묵자.”

“네, 잘 먹겠습니다.”

“그래, 찬찬히 다 묵어야 쓴다잉.”

이자연어머니가 같이 식사하면서 문승협에게 생선가시를 발라주었다. 이자연은 문현아에게 떡갈비를 먹기 좋게 잘라 밥에 얻어줬다.

“아야 자연아, 아그들이 잘 먹은께 오지다잉.”

“나도 그라요, 엄니도 많이드쑈.”

“잉, 우리 딸내미도 많이 묵어.”

이자연어머니가 맛있게 먹는 문승협남매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자연을 보더니 한숨지으며 옷고름으로 눈을 훔쳤다.

“엄니 또 으째그라요.”

“그란께 말이다, 내가 주책없이. 아그들 본께, 니 애기 때 생각나갖고는 그냥.”

이자연어머니는 이자연이 문현아나이 정도였을 때 이곳으로 왔다. 시댁 괴롭힘을 피해 산전수전 겪으며 전전했던 지난 일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했다. 그동안의 설움이 복 받혔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승협이가 태권도를 그렇게 잘한담서?”

“네? 아니에요, 저만큼 배우면 그 정도는 다해요.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너 왔던 날 말이어, 그때 두조아부지가 말하드라. 우리 자연이를 위해 그런 용기 내줘서 고맙다잉.”

“그런 거 아니에요, 우연히 세관 사범님이 대련시범을 해보자고 해서 그런 건데.”

“부끄러워하기는, 자연이랑 나랑 다 들었어야. 두조도 와갖고 다 사과하고 그랬어.”

“오빠, 할머니한테 혼난 게 여기 온 거였구나 맞지?”

“잉? 사모님한테 혼났어?”

“아, 네, 말없이 나갔다고. 조금요, 아주 조금.”

“뭐래, 엄청 혼났으면서. 회사언니랑 저도 같이 혼났어요.”

“현아야 그만해, 자꾸 그러면 다음부턴 안 데리고 다닌다.”

“오빠가 거짓말하면 나쁜 아이라고 그랬잖아. 절대 거짓말하면 안 된다 그래 놓고는, 나한테 왜 그래. 거짓말은 오빠가 했으면서, 흑흑흑.”

“아 알았어, 미안. 오빠가 미안해, 앞으로 안 그럴게 울지 마.”

문현아의 예기치 않은 반응에 모두 당황하였다. 문승협이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현아야, 오빠가 착한 거짓말 한 거여. 그란께, 이 언니 봐서 한 번만 용서해 줘라.”

“착한 거짓말이 뭐예요?”

“그것이 하얀 거짓말인디, 긍께는, 언니가 못난는디 이쁘다고 한 거여.”

“언닌 예쁜데.”

“잉? 그라믄, 지프차기사아저씨가 못난는디, 아저씨 앞에서 남자답게 생겼다고 말해주는 그런 거여.”

“아, 알겠어요. 기분 나쁘지 않게 하는 거짓말?”

이자연의 급조된 설명에 문현아가 배시시 웃었다. 이자연이 엄마와 문승협을 보며 콧등을 찡긋하였다.

문승협남매가 식사를 마치자 이자연어머니가 과일을 내어왔다. 바나나 껍질을 벗겨 하나씩 쥐어주고 복숭아와 참외를 깎았다.

“내일은 출근하는 거제?”

“아니.”

“언제 출근 할라고야? 회사가 니를 언제까지나 기다려준다냐? 쓰잘데없는 소리 말고, 내일 당장 출근해라잉.”

“나 회사 그만둔단께.”

“시방 엄니 죽는 꼴 볼라고 그라냐?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디, 니가 그러믄 안 되제.”

“또 그 소리요? 지겨운께 인자 그만 좀 하쑈.”

“승협이가 할아버지한테 말 좀 해라, 자연누나 출근한다고 쪼께만 지둘려달라고. 내가 부탁하께야?”

“엄니, 그것이 애기한테 할 말이요, 창피하게 왜 그요 진짜.”

“누나, 할아버지한테 말할 수 있어, 괜찮아.”

“내가 니 애비랑 헤어지고, 시댁에 쫓기믄서도 악착같이 산 이유가 넌디, 니가 이러믄 쓰냐? 난 바라는 것 없어야, 그냥 회사 잘 다니다가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서 애 낳고, 니가 행복하게 사는 거. 그거 보는 게 내 꿈이어, 그것도 못 들어주냐?”

“아따 또 그 소리. 알았소, 알았단께라우. 오늘은 아그들도 있은께, 나중에 야그 합시다.”

이자연어머니는 시댁에 쫓기며 아버지 없이 딸을 키운 서러운 감정을 쏟아내려다 참았다. 이자연도 지겹게 들은 이야기에 욱했으나 감정을 다스렸다.

문승협이 격해지는 대화에 과일을 먹다 들고 있었다. 이자연어머니가 갑자기 문승협손바닥을 펴보았다.

“이상하다잉, 얼굴에는 있는디 손에는 없어야?”

“네? 뭐가요?”

“얼굴은 다 좋은디, 손금이 부모 땜시 맘 고생해서 부모복이 별로 없다잉. 그래도 재물은 부족함 없이 쓴 만큼 들어오고, 자기 노력으로 성공해서 상류생활은 하겄다.”

“엄니, 그만하쑈.”

“가만있어봐야, 그냥 한번 보는 거여.”

이자연어머니가 문승협의 관상과 손금을 보았다.

“예술 같은 창의적인 분야로 가믄 그 분야서 최고인디, 오히려 너무 다재다능한 것이 방해되겄어. 연예로 결혼해서 자식은 셋넷에 가정은 행복하겄다. 그란디, 자연이 손금이랑 비스무리하네잉, 아니 거의 똑같은디? 나도 이런 경우는 첨 본다야.”

이자연어머니가 문현아손을 펴는데 술 손님이 들어왔다. 이자연이 문승협남매를 방으로 데려갔다.

“누나, 나랑 누나랑 똑같데. 하하하, 신기하다.”

“나랑 똑같다는디 뭐가 좋아서 웃냐? 나는 징그럽기만 하그만.”

“싫어하는 사람하고 같으면 싫은 거랑 똑같은 거죠, 다른 이유가 있나요?”

“너 은근히 반대로 말한다잉, 좋아하는 사람하고 똑같으믄 좋다는 말 아니어?”

“그렇게 콕 집는 사람도 웃기네요. 누나 엄만 언제부터 저런 걸 알게 됐어요?”

이자연은 엄마가 진짜 무당이라기보다는 자기 방어적으로 만든 환경이라고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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