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무슨 감정일까? - (9)
문승협남매는 늦잠을 잤다. 깨워서 밥을 차려준 사람은 할머니도 이자연도 아닌 첫날 사택에 짐을 옮겨준 여직원이었다. 감기몸살로 못 나온 이자연을 대신한다며 필요한 건 언제든 말하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아프다는 이자연생각에 착잡했다.
점심 무렵 지나가는 지프차기사에게 물었다.
“아저씨, 자연이 누나 많이 아파요?”
“으째 걱정되냐, 곰방 나을 것인께 걱정 붙들어 메.”
“그럼 언제 출근하는지 아세요?”
“출근? 그만둔다는 것 같던디?”
“진짜요?”
“얼핏 들은 거여, 자세한 것은 나도 잘 모르겄다.”
문승협은 뜻밖 소식에 더욱 심란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기보다는 뭐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점심을 차려주는 여직원에게 은근히 속마음을 드러냈다.
“저기, 자연누나 올 때까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뭔 뜻이어?”
“아, 점심 먹고 설거지부터 우리가 할 테니, 누나는 신경 쓰지 말고 원래 일을 하세요.”
“그것은 곤란한디.”
“왜요?”
“소장님이 지시한 일이어 갖고 내 맘대로 못해야.”
문승협은 여직원이 일을 계속하면, 이자연이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자리가 없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여직원의 거절에 심통이라도 부려볼까 했으나, 여직원입장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도 못했다. 필요이상으로 수다스러운 여직원이 불편하였지만 이자연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자연의 어머니는 도시에 살다 이곳으로 왔다. 10년 전쯤 지금보다 훨씬 더 호황기 때였다. 당시 어린 딸 이자연이 있었음에도 청순한 미모에 노래를 잘해서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럼에도 한 번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심성이 착한 순정파여서 이자연의 아빠만을 마음속에 품었기 때문이었다.
이자연어머니의 과거사는 한 편의 신파극이었다. 6.25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은행에 다녔다. 그러다 대출을 문의하러 온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사법시험준비생이었다. 그 남자와 동거하다시피 하며 사법시험합격을 위해 물심양면 지원하였다. 남자는 두 번의 실패 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그해에 이자연을 임신하면서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다. 그러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아들을 통해 신분상승을 바라는 시댁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결혼에 이르지 못했다. 시댁에 달라붙은 마담뚜가 판검사사위를 원하는 기업가딸을 중매하였다. 그 남자가 시댁등쌀에 못 이겨 결혼하는 바람에 헤어져야 했다. 시댁의 외압으로 은행에서 쫓겨나기까지 하였다. 시댁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이자연의 어머니가 방해될 걸 우려해 낙태를 강권했다. 이를 거부하자 폭행과 교통사고를 위장한 위협도 가하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시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지방으로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지방을 전전하며 살다 이자연을 낳았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여직원은 자신도 들은 이야기라 사실인지는 모른다면서도, 어른들 이야기이니 맞을 거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이자연을 어떻게든 원래대로 되돌려놓고 싶었다. 먼저 심경변화를 일으킬만한 일을 생각해 봤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문득 어제일과 연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상을 다 치워가는 여직원에게 어제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누군지 물었다. 여직원이 단박에 소문난 동네 양아치 윤두조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왜 자연누나를 괴롭히는 거예요?”
“중학교 때부터 좋아해서 쫓아다녔는디, 자연이가 맨날 쌩까분께.”
“그럼 어디 가면 그 윤두조를 만날 수 있어요?”
“세관.”
“세관이요?”
“잉, 윤두조아부지가 세관장한테 아들 좀 사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갖고, 항시 세관에 간다드라.”
“윤두조아버지는 뭐 하는 사람인데요?”
“우리 도안광산 작업반장이어.”
문승협은 외항선을 구경하려면 세관이나 선적과장한테 이야기하라던 이자연말이 떠올랐다.
“누나, 외항선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뜬금없이야.”
“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요.”
“알았어, 이따가 선적과장님한테 말하께.”
“지금 말해주시면 안 돼요?”
“아따 우물가에서 숭늉 달라한다잉.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 불자.”
여직원이 바로 가서 선적과장에게 이야기했다. 선적과장이 외항선에 가려면 세관에 가서 출입신청을 해야 하니 다녀오라고 하였다.
문승협이 세관으로 가는 중에 지프차기사에게 윤두조아버지는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젊었을 때는 주먹 좀 쓰던 깡패였으나, 지금은 마음잡아서 광부들 사이에 신망받고 의리 있는 사람이었다.
“근디, 니가 윤두조를 어뜨크롬 아냐?”
“아, 아까 들었어요.”
문승협은 괴롭힘 당한 일을 이야기하려다 참았다. 두 번 다시 그러지 못하게 조치해 달라고 부탁할까 했지만, 혹시 이자연에게 피해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냥 얼버무렸다.
세관에 도착하니 검은띠를 맨 세관직원이 태권도를 지도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아이들 시선이 문승협에게 모였다. 문승협이 먼발치에서 태권도수업을 구경했다. 태권도를 가르치던 세관직원이 문승협에게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지프차기사가 도안광산사장의 손자인데 일 보러 왔다가 잠깐 구경하는 거라고 하였다. 아이들이 도안광산사장의 손자라는 말에 소곤거렸다. 대열 속 아이들 중 몇 명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 모습이 문승협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자연을 괴롭혔던 아이들이었다. 세관직원이 문승협에게 태권도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문승협이 조금 할 줄 안다고 하니, 바닷가에서 괴롭혔던 아이들 중 한 명이 비웃으며 대련 한번 하자고 하였다. 아이들이 손뼉 치며 문승협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쳐다보았다.
“도복이 없어서요, 다음에 시간 되면 할게요.”
“으째, 쫄았냐?”
“사범님, 안짝에 도복 하나 있는디 가져오까라우?”
“오늘 이 친구는 일 보러 온 거니까, 다음기회에 하도록 하자.”
“아따 다음 기회가 어딨다요.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단디, 안 그요?”
문승협은 오늘 온 목적이 아니어서 다음으로 미루려 했다. 그러나 맨 뒤에 있는 윤두조를 발견하고 생각을 바꿨다. 문제아들의 도발을 피하기보다는 이 상황을 기회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호구도 있나요? 대련하다 다칠 수도 있는데.”
“허허, 그럼 가서 여분의 도복 하고, 겨루기 보호대도 가져와라.”
문승협이 안으로 들어가 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사범이 20여 명의 아이들을 열 맞춰 앉혀놓았다. 문승협이 사범에게 대련을 하는 대신 조건이 있다고 하였다.
“조건이라, 뭔데?”
“두 명과 자유대련을 할게요. 한 명은 자원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제가 지명하겠습니다.”
“또 있어?”
“3분 1회씩이고, 사범님 판정에 따라야 합니다.”
“그 정도야 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패자는 승자의 어떤 말에도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복종?”
“아, 별거 아니에요. 친구를 괴롭히지 마라거나, 괴롭힌 친구에게 사과해라, 뭐 그런 정도예요.”
아이들이 문승협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조건 동의한다면서 야단법석이었다. 키 작고 약해 보이는 꼬맹이 말이라 콧방귀 뀌며 서로 대련하겠다고 자원하였다. 윤두조가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다 얼굴에 흉터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다른 아이들이 아쉽다면서도 윤두조를 거역하진 못했다. 얼굴에 흉터 있는 아이는 이자연을 괴롭힐 때 적극 앞장섰던 아이였다.
사범이 문승협에게 나머지 한 명도 지목하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1초의 망설임 없이 윤두조를 지명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택에 일순간 조용해졌다. 윤두조와 그 패거리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느라 말이 없었다. 일부아이들은 문승협이 다칠까 걱정되어 말이 없었다.
문승협은 대련을 하기 위해 호구를 착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구경하는 어른들도 꽤 모여있었다. 순하게 생긴 광산사장의 손자가 이곳 물정을 모르고 큰일을 겪게 됐다는 분위기였다. 문승협의 대련 상대들이 이 지역의 난폭한 말썽쟁이들이라 당연한 기류였다.
문승협은 사실 호구가 있다는 말에 적잖이 당황했었다. 여기 아이들이 평소에 호구를 차고 대련연습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호구가 완전히 새것이고 아이들 중에 파란 띠 이상이 없어 조금 안심하였다. 자유대련은 호구착용여부에 따라 몸의 움직임이 천지차이였다. 문승협은 호구를 차고 대련해 본 경험이 꽤 있었다.
사범이 문승협과 얼굴에 흉터 있는 아이를 마주 세워 인사하게 하였다. 준비와 함께 타이머를 누르며 시작을 외쳤다. 문승협은 시작과 동시에 앞으로 빠르게 다가가며, 오른발 왼발 연속 앞차기로 몸통공격을 한데 이어 오른발 돌려차기로 얼굴을 강타했다. 얼굴에 흉터 난 아이가 거목나무 쓰러지듯 옆으로 넘어졌다. 힘이 제대로 실린 오른발 돌려차기에 턱과 귀를 정통으로 맞아 호구를 쓴 얼굴이 획 돌아가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참관하는 아이들과 구경하는 어른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하였다. 사범도 당황해 쓰러진 아이의 눈을 떠보며 얼굴을 쳐보았다. 다행히 의식이 돌아왔고, 부축해서 그늘에 데려다 앉혔다. 이를 지켜보는 문승협 본인도 자신의 실력에 놀랐다. 사람들이 영화에서나 봄직한 일이어서 웅성거렸다. 키 작고 여리여리한 아이가 자기 몸의 1.5배 정도 되는 아이를 불과 몇 초 만에 쓰러뜨린 걸 목격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범은 애초에 체급차이가 크고 해서 태권도활성화를 위해 시범경기처럼 보여주기 정도로만 생각했다. 예상외 결과와 주위 반응에 이후 대련을 중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윤두조가 약속은 약속이니 대련을 계속해야 한다며 앞으로 나와 호구를 착용했다. 문승협도 계속하겠다고 하였다. 참관하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볼 뿐 윤두조를 막지 않았다. 사범은 마지못해 대련을 계속 이어갔다.
사범이 문승협과 윤두조를 마주 세웠다. 앞서 했던 것처럼 상호인사시킨 후 준비를 외치려는 순간, 윤두조가 느닷없이 선제공격하였다. 문승협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준비와 시작구령을 기다리던 상황이라 무방비상태였다. 윤두조가 대련예의를 무시하고 주먹과 발차기를 날렸다. 정신없이 계속되는 윤두조의 공격에 문승협이 뒤로 밀려 넘어졌다. 윤두조가 문승협의 배 위에 올라타 주먹을 내려치려는 찰나, 사범이 재빨리 붙잡아 그만을 선언하고 둘 다 일으켜 세웠다. 문승협은 얼굴을 맞고 복부를 차였지만 다행히 호구 위에 맞아 충격은 크지 않았다. 사범은 반칙이라며 윤두조에게 주의를 주고 다시 시작을 외쳤다. 윤두조가 불도저같이 공격하였다. 습관처럼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고 올라타 주먹을 내리치려 했다. 이번에도 사범이 황급히 말리며 경고를 줬다.
문승협은 윤두조에게 잡혀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스텝을 밟고 이리저리 뛰며 피하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면 똑같은 속도로 쫓아오는 윤두조의 패턴을 읽었다. 대련 시간이 30초가량 남았을 즈음, 문승협이 발차기를 하며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다 두어 걸음 물러났다. 문승협의 계산대로 윤두조가 빠르게 다가왔다. 더 이상 물러나지 않고 제자리에서 점프하여 뒷차기를 했다. 윤두조얼굴에 정확히 꽂혔다. 윤두조가 쫓아가던 탄력에 얼굴을 맞아 고개가 뒤로 꺾여 벌렁 넘어졌다. 머리에 쓴 호구가 반쯤 벗겨질 정도로 충격이 컸다.
구경하던 어른들과 참관하던 아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어떤 어른은 박수를 치기도 했다.
사범도 깜짝 놀라 넋 나간 사람처럼 서있었다. 이내 윤두조를 일으켜 앉히고 수건으로 코피를 닦으며 상태를 살폈다. 문승협은 윤두조를 바라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범이 윤두조상태가 이상 없자 문승협손을 들어 승리를 선언했다. 문승협이 윤두조에게 다가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손을 내밀었다. 윤두조가 툭 쳤다.
“제 손은 쳐도 좋은데, 좀 전에 한 약속은 쳐버리지 마세요.”
“이 시끼야 뭔 약속.”
“대련하기 전에 말했잖아요, 패자는 어떤 말에도 무조건 복종하기로. 설마, 비겁하게 모른 체하진 않겠죠? 만약 약속을 어기면, 저기 보고 있는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뭔디, 말해봐 시끼야.”
“나중에 따로 말할게요. 그리고 저 태권도 1단이에요, 졌다고 억울할 것 없어요. 태권도경기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런 결과도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싸움이라면 제가 이길 수 없어요, 그건 제가 인정합니다.”
문승협이 윤두조에게 약속이행을 당부한데이어, 태권도의 실력차와 경기 일부분이라 이긴 거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하였다. 윤두조가 조금 수긍하며 스스로 위안 삼았다.
사범이 문승협의 이야기를 듣고 태권도를 알릴 기회라 생각해 아이들에게 한마디 하였다.
“자, 모두들 봤지. 여기 문승협 군이 태권도 1단이야, 태권도 위력이 이렇게 어마어마하다. 태권도는 싸움을 위한 운동이 아니고, 자기를 보호하고 약자를 돕는 곳에 사용하는 우리나라 전통무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연마해서, 다들 검은띠까지 따도록 열심히 한다, 알았지?”
“예.”
문승협은 태권도복을 갈아입고 사범안내로 세관장에게 인사했다. 세관사무실을 나와 기사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세관 밖 내리막길에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있었다. 문승협에게 오라고 손짓하였다.
윤두조의 패거리였다. 워낙 거친 아이들이기에 해코지할까 봐 두려웠으나 용기를 내 갔다. 한 아이가 다가와 저쪽에 윤두조가 기다린다며 가보라고 하였다.
윤두조가 바닷가 벼랑 쪽 비탈길에 앉아있었다. 다가오는 문승협을 한번 쳐다보고는 먼바다만 주시했다. 문승협이 옆에 서있자 엉덩이를 살짝 옮겼다.
“안거.”
“괜찮아요, 그냥 서있을게요.”
“그래, 하고픈 말이 뭐시어.”
“자연누나 알죠? 저도 대충 이야기 들어서 알아요.”
“긍께 으짜라고.”
“자연누나에게 사과하고, 앞으로 괴롭히지 마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디.”
“약속했잖아요, 지면 무조건 복종하기로.”
“그것 말고는 없어? 포도시 그거여?”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를 위해 변하라고 강요하면 안 되잖아요. 더구나 싫은 것을 강요하는 건 고문입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멸시받는 느낌은 아냐?”
“잘 몰라요. 하지만 셋 중에 하나 아닐까요? 좋아만 했는데 멸시했다면, 좋아해선 안 될 사람이고. 멸시할 정도로 어떤 행동을 했던지, 아니면 멸시받는다는 자격지심 같은?”
“째깐한 시끼가 어른같이 지껄이네?”
“사랑도 상대가 바랄 때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 하고, 사랑해서 헤어진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약속을 지키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그건 저와 약속이기전에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니까요. 적어도, 자연누나는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을 좋아하진 않을 겁니다.”
문승협은 드라마에서 봤던 대사를 적절히 써먹었다. 조금 낯부끄러웠지만 효과가 있어 보여 만족했다.
다급히 찾는 지프차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결정을 윤두조에게 미루고 비탈을 올라갔다. 기사가 뛰어와 다친 곳은 없나 이리저리 살펴보고 서둘러 차에 태웠다.
문승협은 차를 타고 가면서 두 번씩이나 윤두조 밑에 깔려 맞을뻔했던 아찔한 상황이 떠올랐다. 태권도가 붙잡혔을 때는 대항하기 어려웠다. 내년에 합기도나 유도를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서도 윤두조에게 이자연을 괴롭힌 대가를 받아낸 것 같아 흐뭇했다. 과연 이자연에게 사과할지 의구심이 들었다.
다음날, 그다음 날도 이자연은 출근하지 않았다. 문승협은 한번 찾아가 만나고 싶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지 고심했다. 오후에 선착장방파제에서 낚시하고 싶다며 여직원에게 부탁하였다.
문승협남매는 지프차로 선착장방파제에 갔다. 여직원과 문현아는 파라솔 그늘밑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뜨거운 햇살을 피했다. 문승협은 기사가 준비해 온 릴낚시를 받아서 가르쳐준 대로 따라 했으나, 미끼가 너무 징그러워 곤혹스러웠다.
“아저씨, 죄송한데요, 이거 정말 징그럽고 소름 돋아서 못 만지겠어요.”
“허허, 웃기다잉. 태권도는 그렇게 잘 함시로, 으째 이 째깐한 지렁이를 못 만진다냐.”
기사가 놀리며 홍거시라는 갯지렁이를 끼워주었다. 문승협은 선착장방파제 끝에 서서 먼바다를 향해 낚시를 던졌다. 입질을 기다리며 주위풍경을 둘러보았다. 방파제 안쪽에 코가 꿴 배들이 줄줄이 묶여있었다. 그 배를 오가며 아이들이 바닷속으로 다이빙하고 수영하였다. 주변 섬들과 먼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다 한가운데 정박한 큰 외항선이 눈에 들어왔다. 한번 가보고 싶다는 이자연이 떠올랐다. 꼭 같이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별안간 두두둑하는 진동이 낚싯대를 통해 손에 느껴졌다. 기사에게 배운 대로 한번 획 채고 릴을 감았다. 낚싯줄이 조금 감기더니 낚싯대가 휘어질 뿐 더 이상 꼼짝하지 않았다. 낑낑대며 이리저리 당겼다.
“허허, 승협이가 지구를 낚았네.”
“네? 지구를요?”
“잉, 바닥이여 바닥, 바닥에 걸렸어.”
기사가 낚싯대를 받아 들고 감았다 풀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래도 꼼짝 안 하자 힘껏 당겨 낚싯줄을 끊었다. 문승협이 실망스러워하였다. 기사가 괜찮다며 낚시와 봉돌을 다시 연결해 주었다. 문승협이 죽상을 하며 꿈틀거리는 미끼에 손도 못 대고 보고만 있었다. 이번에도 기사가 갯지렁이를 끼워주었다.
“태권도하는 것은 사내대장부인디, 낚시하는 건 가시나 멩키로 그라네잉.”
“아저씨도 처음부터 잘한 건 아니잖아요.”
“뭔 소리까? 나는 날 때부터 잘했어야.”
문승협이 입을 삐쭉 내밀며 소심하게 발끈했다. 기사가 펄쩍 뛰듯 과장된 행동으로 계속 놀렸다.
문승협은 큰 고기가 물어주길 소망하며 먼바다를 향해 다시 릴을 던졌다. 잠시 후 처음으로 복어를 낚아 올렸다. 기사가 잡은 복어로 축구나 하자며 또 놀렸다. 이어 졸락이라고 부르는 노래미, 볼락, 쏨벵이, 장태 등이 잡혔다. 처음 낚시를 하는 문승협에게 엄청난 재미이며 큰 전리품이었다. 기사가 낚싯바늘에서 고기 빼는 법도 자상하게 가르쳐줬다. 문승협도 차츰 스스로 갯지렁이를 끼웠다. 낚은 고기도 직접 뺄 수 있게 되었다.
한 시간여 낚시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뱃머리에서 다이빙하며 수영하는 아이들 중에 이자연을 괴롭힐 때 있었던 아이를 보았다. 그제야 낚시 온 목적을 떠올렸다.
문승협이 이자연집을 알아보려고 선창장 쪽으로 갔다. 여직원이 어디 가냐고 물었다. 문승협이 갈증이 나서 음료수를 사러 간다고 둘러댔다. 문현아가 같이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셋이 함께 상점으로 갔다.
문승협은 음료수를 고르는 문현아와 여직원의 시선을 피해 상점주인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아주머니도 문승협처럼 속삭이듯 대답했다.
“아줌마, 이자연이라고 혹시 아세요?”
“잉, 알제?”
“집이 어딘지 아세요?”
“뭐 할라고?”
“병문안 가려고 그러는데, 좀 알려주세요.”
“병문안? 갸가 아프단가?”
“그렇다나 봐요.”
“나가갖고 왼쪽으로 좀 가다보믄 대폿집이 있는디, 거그랑 깃발이 있는 집이어. 갸가 어디 아픈디?”
“저도 아직 잘 몰라요, 감사합니다.”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여직원이 음료수를 가져와 계산하였다.
“아줌마 안녕히 계세요, 감사합니다.”
“음마? 목소리가 원래 째깐한 줄 알았드만, 아니네?”
“뭔 목소리라우? 우리 광산사장님 손자여라우.”
문승협은 상점주인이 대화내용을 말할까 봐 당황했다. 얼른 다시 들어가 여직원등을 떠밀고 나왔다.
“누나, 기사아저씨 목말라 죽을지도 몰라, 빨리 가자. 안녕히 계세요.”
“잉 그래, 조심 가그라.”
문승협은 다시 낚시를 던져놓고 이자연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 생각했다.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문현아가 햇볕에 너무 오랫동안 있어서 인지 그만 집에 가자며 졸랐다. 문승협은 잡은 물고기를 바다에 놓아주고 낚시장비를 거두어 사택으로 갔다.
문승협남매는 씻고 저녁을 먹었다. 문현아와 여직원이 TV를 보다 졸았다.
문승협이 슬며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비가 올 것 같은 끄물끄물한 하늘이었다. 한 여름이라 일곱 시가 다되었는데도 아직 밝았다. 이자연집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몰래 사택을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뛰다 걷기를 반복하며 이십여 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선착장 상점주인이 알려준 이자연집 근처였다. 무릎에 손을 짚고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비오 듯 쏟아지는 땀을 옷으로 닦아내었다. 잔호흡을 정리하며 빨갛고 하얀 깃발이 있는 집을 찾았다. 주변을 두 바퀴 돌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갑자기 바람이 강해지고 비가 한두 방울 떨어졌다. 비바람을 피하려고 골목안쪽 산끝자락에 넓은 처마가 있는 집으로 갔다. 싸늘한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거세진 바닷바람에 대나무숲이 곧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담귀퉁이에 세워놓은 대나무에 묶여있는 빨간색 하얀색 색동깃발이 눈에 띄었다. 이자연의 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길가에 있었는데도 술집 뒤쪽에 붙어있는 집이어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대나무에 묶여 휘날리는 깃발들이 왠지 스산했다. 대문으로 가 안쪽을 살펴보았다. 신발도 안 보이고 인기척도 없었다.
앞쪽 길가에 있는 시끌시끌한 술집으로 갔다.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살펴보았다. 방에는 두 명의 여자가 네 명의 남자사이에 앉아 안주를 먹여주었다. 홀테이블에는 한 명의 여자가 두 명의 남자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세 명의 여자는 외모로 보아 이자연의 어머니라기엔 많이 젊어 보였다. 방에서 박수소리가 났다. 화장을 하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앳된 여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
‘사공에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 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한 남자가 장단에 맞춰 손뼉 치는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부둥켜안고 춤을 추다가 여자의 저고리에 손을 넣으려고 하였다. 여자는 남자손길을 밀어내기에 바빴다. 앉아있는 남자들이 낄낄거리며 보고만 있는 것이 전혀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문승협이 망측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홀에 앉아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못 본체 했으나, 여자가 한복치마단을 추켜올리며 금세 밖으로 나왔다.
“못 보던 얼굴인데, 니는 누꼬? 얼라가 이런 니나놋집에 기웃대는 거 아이다.”
“저, 자연누나 있어요?”
“오, 서울말툰데. 서울아가 자연이는 와 찾노. 자연이네 집은 여 아이다.”
“그럼 어디예요, 좀 알려주세요.”
“여는 니 고추가 요만했을 때, 자연엄니가 장사하던 곳인기라. 여는 팔고, 다른 데로 이사 갔다 아이가.”
“그럴 리가, 상점아줌마가 여기라고 했는데. 어디로요, 멀리 갔나요?”
“하모, 엄청시리 멀리 갔제. 와, 알려주까?”
“네, 알려주세요.”
“공짜로 알려달라꼬? 거는 안되지.”
“그럼 어떻게, 지금은 돈도 안 가져왔는데.”
“돈이 없다꼬? 그라모 여다 뽀뽀 한번 해봐라.”
“네?”
“호호호, 뭘 그리 놀라노, 순진한 머스마네. 여서 우측으로 돌아가가 바로 거다.”
“네?”
“여 모퉁이 돌믄 대폿집이 있는데, 거라꼬.”
“이 모퉁이 돌아가면 있다고요? 그런데, 대폿집은 뭐고, 니나놋집은 뭐예요?”
“얼라가 별 걸 다 알라카네? 니나놋집은 내같이 이쁜 누나랑 술 마시는 기고, 대폿집은 그냥 술 마시는 기다.”
“아, 네, 감사합니다.”
“호호호, 나중에 돈 많이 벌어가 놀러 온네이.”
한복 입은 여자는 당황하는 문승협모습이 재미있어 놀릴 뿐 다른 악의는 없어 보였다.
문승협이 모퉁이 쪽으로 가다 뒤돌아 보며 다시 한번 목례를 했다. 한복 입은 여자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담뱃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승협은 한복 입은 여자가 뱉어낸 한숨 섞인 담배연기가 왠지 서글펐다. 그 여자의 가슴에 깊이 맺힌 무언가를 뱉어내는 것 같았다.
한복 입은 여자가 말한 대로 모퉁이를 돌아가니, 약간 어두워 보이는 술집이 있었다. 술집 유리창에 ‘바다노래 대폿집’이라고 쓰여있었다. 대폿집주방 옆으로 난 통로안쪽에서 새 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이자연의 어머니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주방에서 안주를 만들고 있었다. 세 명의 남자가 홀 테이블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주방에 있는 아주머니를 흘깃흘깃 훔쳐보았다. 아주머니가 안주를 손님테이블에 가져다 놓고 돌아서는데, 안쪽에 앉은 남자가 아주머니손을 잡고 옆으로 앉으라며 강권했다. 급기야 손을 뿌리치며 거부하는 아주머니를 강제로 껴안았다. 앞에 앉은 두 남자는 헤죽헤죽 웃을 뿐 모른 척 막걸리만 마셨다. 아주머니가 안간힘을 쓰며 거부하면서도 소리치지 않았다. 남자가 아주머니의 저고리 속으로 손을 짚어 넣으려고 하였다. 견디다 못한 아주머니가 그만하라며 비명을 질렀다.
문승협이 보다 못해 안으로 들어가 도우려는 순간, 주방 옆으로 난 통로안쪽에서 꽝하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아주머니의 비명소리를 들은 이자연이 튀어나왔다. 이자연이 여자가슴이나 주물라 치면 니나놋집에나 가라고 소리 질렀다. 남자가 이자연에게 쌍욕을 하였다. 아주머니가 주방에 있던 소금 담긴 바가지를 가져와 남자를 향해 쫙 뿌렸다. 남자가 아주머니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웃고만 있던 남자들이 말리며 옥신각신했다. 그때 누군가가 안절부절못하는 문승협어깨를 툭툭 쳤다.
“아야 아가, 니가 으째 여그 있냐?”
“누군디 그란가?”
“잉, 사장님 손자. 니가 승협이 맞지야?”
“네 맞아요, 누구신지 모르지만 좀 도와주세요.”
“으째, 뭔 일인디?”
“저 아저씨들이 술 먹고 아줌마에게 행패 부려요.”
두 남자 중 한 명이 들어가서 한마디 호통치자, 난동부리던 남자들이 바로 수그러들었다. 곧바로 테이블 위에 돈을 꺼내놓고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자기들이 가져온 우산도 챙기지 못하고 도망가는 비겁한 모습이었다. 문승협은 할 수만 있으면 쫓아가 한대 패주고 싶었다. 전형적인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동물이었다. 난동부리던 남자들을 쫓아낸 두 사람이 나오려고 하였다. 아주머니가 붙잡아 앉히고 술상을 준비했다. 이자연은 도망간 남자들이 앉았던 테이블을 치웠다. 문승협을 알아본 남자가 창밖에 있는 문승협을 쳐다봤다. 문승협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창 옆으로 몸을 숨겼다. 조금 긴장이 좀 풀리고서야 세찬 비바람에 옷이 다 젖은 걸 알았다. 몸이 오싹해지는 추위에 움츠러들었다. 아주머니가 언제 나왔는지 불쑥 수건을 내밀었다.
“아가, 이걸로 닦고 이리 들어오니라. 고맙다잉, 니가 도와달라 했다믄서.”
“고맙긴요. 어차피 저 아저씨들이 들어가서 도와줄 건데, 그냥 말한 것뿐이에요.”
문승협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와 옷을 닦으며 아주머니에게 이끌려 들어갔다. 이자연이 기겁하며 어떻게 왔냐는 눈빛으로 문승협을 바라봤다. 잠깐 망설이다 들고 있는 수건을 빼앗아 문승협의 머리를 털어줬다. 마른 수건 몇 장을 가져와 팔과 등을 닦아주었다. 다른 수건을 주며 다리랑 닦으라고 손짓하였다. 문승협이 닦는 둥 마는 둥 하고 뻘쭘히 서있었다.
이자연이 문승협손을 잡고 주방 옆 통로를 지나 방으로 데려갔다. 한기에 부르르 떠는 문승협에게 얇은 담요를 꺼내 둘러주었다. 걱정스럽고 심란한 마음으로 문승협을 바라봤다.
이자연방에서 향긋한 내음이 났다. 문승협이 얼마 전 이자연품에 안겼을 때와 같은 냄새였다. 이것이 이자연의 향기라고 생각하였다. 이자연이 쳐다보자 지레 찔려서 말을 건넸다.
“누나, 밖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예요?”
“회사 경비반장 하고 작업반장.”
“나는 저분들을 본 적 없는데, 어떻게 나를 알지?”
“니는 몰라도 경비반장인께 알제.”
“그럼, 다른 한 분이 작업반장이면, 그 윤두조의 아빠 아니에요?”
“니가 우째 알어.”
“그래서 그 짐승 같은 놈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간 거구나.”
“니가 으째아냐고?”
“다 정보원이 있죠, 작업반장인 윤두조의 아빠가 옛날에 한주먹 했다는.”
“그건 그렇고, 여그는 또 으째 알고 왔냐?”
“정보원이요.”
“장난 말고 언능 말해라잉.”
“아는 사람한테 물어서 찾았고, 누나가 걱정돼서 왔어요, 됐어요?”
“쬐그만 녀석이.”
이자연은 문승협이 어리지만 누군가 자신을 생각했다는 게 좋고 쑥스러웠다.
“왜 사택에 안 와요, 걱정했잖아요.”
“인자 그만둘라고.”
“왜요?”
“왜요는 일본 요여. 그만둔디 뭔 이유가 있다냐, 그냥 그만두는 거제.”
“무슨 말이에요? 좋아하는 건 이유가 없을 수 있지만, 싫어하는 건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했어요.”
“그라믄 그만두는 걸 좋아한 갑제.”
“말장난하지 말고요, 네?”
“아름다워 질라고. 니가 말했잖애, 나만의 아름다움. 그럴라믄 내 꿈을 찾아야제.”
문승협은 자기가 이자연에게 했던 말이어서 더 이상 되묻지 못했다. 이자연에게서 뭔가 의미심장하고 결연한 표정을 보았다.
“자, 인자 그만하고 일어나. 밤도 늦었은께, 우리 신사분은 내가 모셔다 드리께.”
문승협이 거절했으나 이자연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끌려가듯 따라 나갔다.
문승협이 가겠다며 이자연어머니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맛있는 거 해서 초대할 테니 거절하지 마라고 하였다. 작업반장 윤두조의 아버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웃음으로 인사했다. 경비반장은 어두운데 조심히 가라고 하였다.
다행히 비바람이 소강상태였다. 사택까지 가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지만 몇 개 안 되는 가로등이 꺼져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 다니는 사람마저 없어 적막감이 들었다.
이자연이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손에는 손전등을 들었다. 문승협과 자신의 발걸음 앞을 교대로 비추며 걸었다. 손전등을 든 손에 우산을 같이 들더니 문승협손을 잡았다. 이자연은 아무 감정 없이 잡았으나, 문승협은 따뜻한 손길에 기분이 미묘했다. 최선경과 손바닥을 마주치다 깍지 껴 잡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누나, 손전등이 앞길을 밝게 비추는 것처럼, 누나 앞길도 훤히 밝았으면 좋겠어요.”
“그래, 고맙다.”
문승협이 쑥스러워서 한 말이지만, 이자연은 문승협의 진심을 알기에 손을 한번 꼭 쥐었다.
이자연이 사택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갔다. 문승협은 급히 2층 베란다로 올라갔다. 이자연의 손전등 빛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한편으로는 몰래 밖에 나갔다 돌아온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짜릿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