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1985

거미줄, 그리고 '마비된' 사람들

by 현재를즐겨라

Ⅰ. 무너져 가는 세상


무너져가는 세상을 견디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사탄탱고』는 202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소설이다. 이 헝가리의 작가는 '묵시록'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인물로, 사실 나에게는 수상 이전에는 그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작가이기도 하다. 이런 점이 노벨 문학상이라는 상징이 지니고 있는 힘이 아닐까. 아무튼 이 소설 또한 묵시록, 다시 말해, 종막에 다다른 세계와 그 속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적 서사를 담고 있다. 그 안을 이루는 것은 꿈도 희망도 사라진, 모든 것이 소진된 사람들이다.

소설은 동구권이 붕괴되고 있었던 1980년 대 헝가리의 집단 농장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급료는 지급이 안된 지 오래이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농장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떠날 곳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마을을 떠났으며, 형식적인 시스템만 남아있는 종말 직전의 마을.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떠날 수가 없었던 것에 가깝다. 갈 곳이 없는 소외된 사람들. 외딴섬과 같은 그곳에 고립된 이들은 농장의 재기를 꿈꿨지만, 계속되는 실패와 좌절에 익숙해진 채 그저 본능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간다.

기존의 도덕은 이미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슈미트'와 '크라네르'는 8개월 만에 찾아온 마을 사람들의 급료를 갖고 도망을 가려고 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그저 정욕에 이끌려 불륜을 일삼는다. 또한 그들은 사망한 이웃, 호르고시의 딸들을 상대로 매춘을 행한다. 호르고시 부인은 이를 막을 힘도 열의도 없어 보인다. 작 중 '후터키'라는 인물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속의 돼지'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이어서 그는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이 세계라는 돼지우리 속에서 태어나 갇혀 있지 ... 그리고 오물 속에 뒹구는 돼지들처럼 뭐가 어찌 된 건지도 모르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젖꼭지를 향해 아우성치지. 사료통으로 빨리 가려고, 밤이 되면 침대로 돌아가려고 허둥대는 거야." (pp. 209~210)

이야기는 '이리미아시'라는 인물의 등장과 함께 변화를 맞게 된다. 이리미아시는 과거 농장의 번영을 이끌었던 사람으로, 몇 해 전 마을을 떠났으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사고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던 인물이기도 하다. '농장의 구원자'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게다가 마을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하나 둘 술집으로 모인다. 하지만, 그것은 동상이몽일 뿐이다. 이리미아시는 그들의 구원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리미아시'와 그의 파트너 '페트리너'는 '지도부'의 명을 받고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던 정보원임과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도는 것을 막는 감시역이었다. 더 나아가, 아직도 마을에 남아있을 그들의 나머지 잔반마저 빼앗으러 온 '사기꾼'일뿐이다.


구원을 할 생각이 없는 메시아와, 메시아가 아닌 존재를 추앙하는 구도자.

관계는 이미 시작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Ⅱ. 거미줄에 묶인 사람들

거미줄, 그리고 '마비된' 사람들

이야기는 '술집'이라는 공간으로 모여든다. 마을 사람들은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술집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다. 이곳저곳에 거미줄이 쳐져있는 남루한 장소. 거미줄은 '술집 주인'에게도 골칫거리였다. "기어코 사는 날이 다할 때까지 행주를 들고 거미들을 쫓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p. 213). 그럼에도 그는 거미의 실체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거미줄은 술집 이곳저곳에 쳐져 있지만, 한 번도 거미를 본 적은 없다. 그렇기에 술집 주인은 '거미줄'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거미와 거미줄은 벗어날 수 없이 '마비된' 그들의 처지를 상징한다. 사람들은 농장 마을에 '묶여'있다. 농장 마을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곳을 떠난 뒤에 갈 곳도, 그들을 맞아줄 사람도 없다. 그저 언젠가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상상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리미아시의 등장은 그 소망이 이뤄지기 직전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한 줄기 빛이 드리우면서 그들은 전에 없던 흥분을 맛본다. 그렇게 술집에 모인 그들은 "탱고 한 자락!"을 추기 시작한다.


화양연화(花樣年華). 희망을 품은 그들은 꽃 같던 과거의 시절을 케레케시의 아코디언과 슈미트 부인의 탱고로 추억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아름답지는 못하다. 이미 그들은 과거의 그들이 아니다. 술집 안에는 자신만큼은 깨끗하다고 여기는 정욕에 가득 찬 사람들과 그저 메시아를 쫓는 맹신도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스스로 희망을 쫒을 생각은 없이 욕망만이 남은 채로 메시아에게 기대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단 한 사람. 후터키만이 그나마 자신의 현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의 쾌락은 술집에 있던 마을 사람 모두가 거미줄에 뒤덮이는 장면으로 마무리가 된다.

"한 주 두 주가 가고 한 달 두 달이 지나는 동안 거듭해서 패배를 겪고 계획들은 혼란에 빠져 사그라지며 해방에 대한 소망은 끝없이 쪼그라드는 것, 가장 두려운 위험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오히려 똘똘 뭉치고 의지력을 발휘하기도 하니까. 그런데 소멸에 이르기까지는 불운의 길이 아직 남았는데, 이미 막장에 다다른 이곳 사람들에게는 패배조차 더 이상 가능하지가 않았다. 위험은 땅 밑에서 솟아나 사람들을 덮치는 듯했으나 그 근원이 무엇인지는 분명치는 않았다. 어떤 때는 적막감에 화들짝 놀라 구석으로 숨어들어 안전을 바라면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음식을 씹는 게 고통이 되고 삼키는 일도 마찬가지며 주위의 모든 것이 점점 느려지고 공간은 갈수록 좁아진다. 이런 퇴화의 결말은 바로 가장 두려운 마비라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pp. 195~196)


하지만 거미줄에 묶여있는 것은 그들뿐만은 아니다.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대위'와 '지도부'라는 거미줄에 걸려있는 노예일 뿐이다. 대위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들킨 뒤 이리미아시가 분노한 까닭도 그것에 있다. 농장 사람들에 대한 이리미아시의 원색적인 비난에 페트리너가 견딜 수 없도록 속이 아팠던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정보원이자 감시역인 그들에게도 자유가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에게 농장에서의 사기극은 자신들이 거미줄을 끊고 자유를 찾는, 새로운 시작점이 될 예정이었다.

"그자들은 여전히 더러운 의자에 주저앉아 저녁마다 감자 요리나 먹으면서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의아해하고 있을걸. 의심에 가득 차 서로를 감시하고 조용한 방에서 큰 소리로 트림이나 하고. 그리고? 기다리는 거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끝도 없이 기다리다가, 누군가 자기들을 속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겠지. 돼지를 잡는데 혹시 뭐 주워 먹을 거라도 떨어질까 싶어 바닥에 배를 댄 채 도사리고 앉아 기다리는 고양이처럼 말이야. 그자들은 옛날 성에서 시중을 들던 때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 주인은 벌써 머리에 총알을 박고 자살했는데, 저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체 주위에서 우왕좌왕하는 거야." "상상이 지나치네, 대장. 듣고 있자니 속이 안 좋아지잖아!"(p.71)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의 계획은 성공했다. 소외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소외되었던 '에슈티케'라는 소녀의 안타까운 죽음을 이용해 마을 사람들을 꾀어냈다. 과거 그들이 큰돈을 빚졌던 '술집 주인'을 제외한 마을 사람들은 이미 그들을 메시아로 여기고 있었다. 이리미아시는 농장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낙원이자 '가나안'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농부들을 속이고 그들의 남아있는 돈을 강탈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새로운 터전에서의 시작을 꿈꾸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었다.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 그리고 그와 동행하게 된 호르고시의 아들 서니는 도시로 돌아가는 길에 기이한 일을 겪는다. 나무에 매달린 채 베일에 가려진 세 구의 시신. 그리고 떠오르는 시신. 이어서 들리는 몸 없는 시신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목소리. 곧이어 하늘로 솟구쳐 사라진 시신. 그들이 본 것은 신이며, 천국이며, 동시에 지옥의 광경이었다. 이리미아시는 보이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인해 자신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환상 따위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거미줄을 끊고 도망칠 수 없었고, 그 속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는 것을 자각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거고, 그다음엔 눈을 믿지 않는 거지. 페트리너, 그건 우리가 언제나 빠지고 마는 덫이야.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지.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란 게 결국은 자물쇠를 바꿔다는 일일 뿐이거든. … 차라리 목을 매다는 게 현명하다는 거야, 늘어진 귀 양반아! (p.322)

그렇기에 이리미아시는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착실히 행하는 것을 택한다. 그렇게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는 마을 사람들을 그들도 모르게 자신의 연락망이자 감시망으로 만들어 버리며, 자신들의 임무를 마무리한다. 단 한 사람, 후터키만은 그 사실을 알고 격분하지만 말이다.




Ⅲ. 사탄이 부리는 인형극, 사탄 탱고


탱고는 '춤의 종착지'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젊은 시절 다른 종류의 라틴 댄스를 즐기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고 점차 움직임이 힘들어지면서 찾게 되는 장르라는 점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밀롱가'라는 전용 무도장 안에서만 이뤄지는데, 이런 탱고의 특징들이 이 이야기와 꽤나 닮아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 같다. 노쇠해 가는 사람들과 시스템이 붕괴되어가고 있는 국가. 그리고 그 속에서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 어쩌면 그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찾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안될 것을 알면서도 매주 로또를 사는 나처럼 말이다.


이야기의 종막은 몇몇을 제외한 사람들이 이미 떠난 마을에 돌아온 의사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의사는 그의 본분을 다한다. 기억하는 것. 그리고 기록하는 것. 그리고 마치 자신이 쓴 글대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이윽고 들려오는 종소리. 자신이 갖게 된 능력에 고양된 의사는 종소리를 상서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 시작을 찾으러 떠난다. 하지만 종소리가 시작된 곳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말을 하는 능력조차 잃은 어느 노인의 발버둥이었을 뿐이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죽음의 종소리를 우렁찬 천국의 종소리와 혼동했다."(pp.392~393)


그리고 다시 노트를 펴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어낸다. 마치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진다던 맹인 '코린'의 말처럼, 그리고 그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 '에슈티케'처럼 말이다. 의사가 앞으로 써 나갈 이야기에서 모두는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지만, 그것은 역시나 상상과 현실의 경계, 혹은 천국과 지옥의 경계 어딘가에 머무를 뿐이다. 그걸 암시하듯, 소설의 마지막이자 의사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의 첫 장은, 소설의 첫 도입부와 동일하다. 이야기는 순환으로 매듭짓게 된다.


결국 이야기 속의 그 모든 것은 사탄이 부리고 있는 탱고일 뿐이다. 단행본 뒷 표지에 이런 문구가 쓰여있다. "탱고의 기본 스템 - 앞으로 여섯 스텝, 그리고 뒤로 여섯 스텝." 그 말을 그대로 따른다면, 기본 스텝의 끝은 결국 제자리이다. 나아지지 않는 답답함. 풀리지 않는 문제들. 그저 자물쇠만 바뀌는 체제 하에서 자유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 벗어날 수 없는 거미줄. 그럼에도 문제의 시발점인 '거미'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상황. 작가는 무너져내리는 자신과 주변의 상황을, 잔혹한 '사탄'이 조종하는 탱고로 비유한 것이 아닐까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떤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