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골딩,『파리대왕』, 1999, 유종호 역, 민음사
흔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소설들을 읽으면 그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힘이 느껴진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파리대왕』이 처음 쓰인 1950년대는 물론이거니와, 7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이 이야기는 여전히 충격을 준다.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이 시대를 막론하고 독자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소설들이 '고전'이 되는 것인가 싶다. 『파리대왕』은 핵전쟁이 일어난 후, 비행기로 피난을 가던 아이들이 외딴 무인도에 떨어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적어도 그 외견은 '소년들의 모험'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 소설이 표현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 쓰인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국가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총력전'은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그 안에서 인간은 그저 전쟁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을 뿐이다. 심지어 나치 독일은 '퍼비틴'이라는 마약성 약물을 공급해 인간을 '전쟁 기계'로 만들기도 했다. 퍼비틴을 섭취하면 공감능력이 저하되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독일군이 프랑스와의 전선에서 3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퍼비틴' 덕분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전쟁을 위해 병사들에게 마약을 보급하는 건 '인간'의 행동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짐승'의 짓이었다.
윌리엄 골딩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 중 한 명이었다.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이상(理想)을 잃었다. 총포가 오가는 현장에 있는 것은 그저 명령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파리떼'들과, 그리고 그 명령을 내리는 피비린내 나는 '파리대왕'이 있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골딩은 '인간이란 존재는 본래 악한 존재가 아닐까'라는 고민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가 이룩한 문명과 사회가 붕괴하는 것을 직접 목도했다.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인간과 사회가 얼마나 힘없이 무너지는지를 지켜본 그는 소설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파리대왕』에는 마지막의 해군 장교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어른'들도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이야기는 '아이들'만이 살아가는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아이들은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사회화가 덜 된 원초적인 본능을 지닌 존재들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아이들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순수한' 의미의 선과 악을 모두 표현할 수 있었다. 고작 예닐곱에서 열두 살의 아이들이 서로를 향해 창을 던지는 광경은 얼마나 잔혹한가. 어쩌면 이는 명령에 따라 총포를 마주했야만 했던 자신들이 고작 어린아이에 불과했다고 조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기막힌 우화 속에서, '랠프'는 문명을 상징한다. 모든 아이들의 지명을 받아 '대장'이 되었으며, 주도적으로 규칙을 정했다. 그리고 무리의 생존과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모든 아이들이 규칙을 준수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리더로서 랠프는 미숙했다. 가장 합리적인 이야기를 했던 '돼지'를 무시했으며, 무엇보다도 효과적으로 무리를 이끌지 못했다. '봉화'를 피워 자신들이 무인도에 갇혀있음을 알리는 것은 생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랠프는 그것을 무리에 관철시키지 못했고, 결국 '잭'을 비롯한 성가대원들, 그리고 다수의 꼬마들은 랠프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랠프'의 무리에서 더 이상의 규율은 찾아볼 수 없었고, 무리는 서서히 붕괴되었다.
무리의 질서가 무너지고, 결국 붕괴되는 단초가 된 것은 '공포' 때문이었다. 고립된 섬에서 구조를 기다리면서 모든 아이들은 각자의 공포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공포의 현신(現身)이 누군가에게는 뱀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짐승'이었다. '실체'조차도 모르는 미지의 대상은 랠프에게도 '두려움'이었다. 결국 '미지에 대한 공포'를 해결하지 못한 리더는 차츰 힘을 잃어간다.
이때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성가대의 리더 '잭'이다. 잭은 '봉화'를 올리는 것보다, 멧돼지를 잡아 식량을 보충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잭은 자신과 성가대 아이들로 '사냥 부대'를 꾸려 멧돼지 사냥을 나선다. 처음에는 멧돼지를 찌를 용기조차 없었던 잭이었지만, 기어코 잭과 사냥부대는 멧돼지 사냥에 성공한다. 잭은 이를 통해 랠프와 모든 아이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봉화'를 꺼뜨린 것에 대한 질책이었고, 잭은 그 사건을 기점으로 랠프와 갈라서게 된다.
한편, 랠프가 리더로서의 권위를 점차 잃어가면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사냥 기술을 가진 잭의 무리로 합류하게 된다. 거듭되는 사냥으로, 잭의 무리는 점차 야만적 본능에 이끌리는 집단이 된다. 그들의 리더가 된 잭은 앞서 말한 아이들의 '공포'를 자신의 권위를 위해 이용했다. 멧돼지 사냥과 '짐승' 사냥을 동일시했다. 멧돼지를 사냥하는 것처럼 잭과 아이들은 '공포'를 물리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얼굴에 색을 칠하고, 무리 지어 춤을 췄다. 야만으로 돌아간 잭은 더 이상 '대장'이 아닌 '추장'으로 불렸다. 즉, 잭은 인간의 야만성을 상징한다.
세 소년은 모두 잭이 어째서 죽이지 않았는가를 알고 있었다. 칼을 내리쳐서 산 짐승의 살을 베는 것이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용솟음칠 피가 견디기 더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p. 43)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 이제 공포 속에서 지독하고 절박하고 맹목적인 딴 욕망이 생겼다. (p.227)
'광기 어린 공포'는 문명을 야만으로 역행하게 했다. 한때 인간은 과학 기술의 진보와 그로 인한 이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간은 얼마나 결점이 많은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단서를 윌리엄 골딩은 '공포'에서 찾았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의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적 공포'로 전이되는 순간, 문명은 흔들린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마녀'를 두려워했다.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악마화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끝없는 공포를 느끼는 인간의 결함은 그대로 사회의 결함이 되었다. 그 결과 '마녀사냥'과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파리떼는 사이먼의 콧구멍 아래를 간질이고 넓적다리 위에서 등 넘기 장난을 하였다. 파리떼는 새까마니 다채로운 초록빛을 띠고 있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리고 사이먼의 전면에는 이 막대기에 매달려 씽끗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사이먼은 눈을 뜨고 다시 쳐다보았다. -흰 이빨과 몽롱한눈과 피가 보였다- 그리고 태곳적부터 있어 온 피할 길 없는 인식이 그의 응시를 떠받치고 있었다. 사이먼의 오른편 관자놀이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p.206)
"난 너희들에게 경고해 둔다. 나는 조금 화가 나 있어. 알겠니? 너희들은 이곳에 소용없는 친구들이야. 알겠니? 우리는 이 섬에서 재미있게 지내려고 해! 그러니 버릇없는 아이야, 속이려 덤벼들지 마! 그렇지 않으면......" 사이먼은 자기가 거대한 아가리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 속은 새까맸다. 점점 퍼져가는 암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하고 파리대왕은 말하였다. "우리는 너희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을 거야. 알겠어? 잭도 로저도 모리스도 로버트도 빌도 돼지도 랠프도. 너희들 모두. 알겠어?" 사이먼은 그 아가리 속으로 삼켜져 들어갔다. 그는 쓰러져서 의식을 잃었다.(p.215)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라 해도 '사이먼'이 파리대왕과 대화를 하는 장면일 것이다. '사이먼'은 '랠프'의 무리에 협조하지만, 산 중턱 넝쿨 아래에 자신의 근거리를 따로 두고 지낸다. 아이들은 밤이 되면 늘 사라지는 사이먼을 '정신이 이상한' 아이 취급한다. 하지만 사이먼은 그저 공포에 질려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한 공포의 현신(現身)이 사이먼에게는 '파리대왕'이었다. 잭의 무리가 '짐승'에게 바친 멧돼지의 머리. 그리고 그 피비린내에 이끌려 그저 본능에 따라 멧돼지의 머리를 빙빙 도는 파리들. 사이먼은 '파리대왕'과 대화를 한다. 사이먼이 보고 들은 것은 자기 안의 두려움이고, 공포의 망령이었다. 사이먼은 결국 그 '파리대왕'의 아가리에 삼켜진다. 자신이 만든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 우화는 오늘날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기에 더 몰입감 있게 읽힌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파리대왕'은 영원히 살아있다. 러시아와 미국의 누군가인가, 혹은 그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가. 우리는 '봉화'를 올리는 생존의 문제를 앞에 두고도, 상상의 적인 '짐승'과 싸운다. 미국과 중국의 완력 다툼, 캄보디아의 한국인 납치사건, 미국과의 관세협상까지 모두 정쟁의 도구일 뿐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과연 대화가 가능한가. '소라'를 들고 있는 사람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을까. 자신의 에고가 강해질수록 대화는 자존심 싸움이 된다. '랠프'와 '잭'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2017년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 시위가 있었다. 대통령이 자신 주변의 인물에게 크게 기대면서, 사실상의 권력을 이양받은 '비선실세'의 농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위는 평화로웠고, 대통령은 헌법의 시스템 아래에서 탄핵되었다. 광장은 우리에게 정치적 효능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 누군가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는 목적으로 광장을 이용한다. 광장은 때로는 '태극기'로 물들고, 때로는 어떤 '연대'의 깃발로 물든다. 그러자 대화의 선봉이 되어야 할 의원들마저 국회를 버리고 광장으로 나왔다. 좌우를 막론하고 사실을 기반으로 싸우지 않게 되었다. 반대편은 우리의 적이라고 그저 감정에 호소할 뿐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 가끔은 사회가 어떤 망령에 휩싸인 것 같다는 착각까지 드는 지경이다.
『파리대왕』은 연기를 발견한 어떤 해군 장교에 의해 아이들이 구출되면서 끝을 맺는다. 그제야 잭과 잭의 무리는 자신들의 야만성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대장'이 누구냐고 묻는 해군의 질문에 잭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불타버린 재가돼버린 섬과, 붉게 물든 머리, 돼지에게서 빼앗은 허리춤의 '안경'.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과오를 보여주는 증거가 될 뿐이었다. '랠프'를 포함한 모든 아이들은 그저 흐느껴 울 뿐이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이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p. 303)
이렇듯 『파리대왕』은 '불안과 공포'의 결과를 보여줄 뿐, 그 뒤의 이야기는 열어둔 채로 마무리된다. 우리는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계속될 것만 같았던 평화는 '공포'를 조장하는 '잭'과 사회에 만연한 '파리대왕'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사실 '랠프'에게는 수많은 기회가 있었다. '돼지'의 말을 빠르게 귀담아 들었다면, 잭의 의견을 존중했다면, 그리고 '사이먼'과 모든 아이들의 정확한 '숫자'를 파악했다면, 결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 또한 명확하다. '공포'의 횡포를 막아낼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섬'이 모두 불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