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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수진 Sep 02. 2022

독일에서 들은 이야기, 제주 그리고 더

2022 카셀 도큐멘타 리뷰 2

5년마다 열리는 미술계 주요 행사 카셀 도큐멘타가 올해로 15번째를 맞이했다.

열다섯이라는 일반적인 숫자 위에 도큐멘타의 선택으로 특별함이 더해진다. 최초의 아시안 총괄 큐레이터.

이 결정은 최초의 아시안이라는 수식어에만 충실하지 않고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1인치의 벽을 넘어선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고 했나. 승리자이지 못해 잊혀져 가던, 누군가에겐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겐 존재조차 몰랐던 이야기가 되는 지금. 도큐멘타는 우리 앞에 그 이야기들을 내놓았다.


카셀의 중심가에 위치한 자연사 박물관에는 한국인들로 구성된 비주얼 리서치 그룹 이끼바위쿠르르ikkibawiKrrr의 전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2021년 결성된 팀은 식물과 인간, 문명과 자연 현상, 식민주의와 생태의 다면적 연결 고리들을 탐구한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이끼 바위와 의성어 쿠르르의 조합으로 공기와 흙의 경계에 살며 자신들의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때로는 경계의 층을 두텁게 하는 이끼처럼 삶과 예술 사이에서의 경계를 확장하길 희망하며 활동하고 있다.

Tropical Story, 2 채널 비디오 설치, 2022

작품 트로피컬 스토리는 현재 남아있는 태평양 전쟁의 잔재를 추적한다.

제주도, 미크로네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쟁이 남긴 발자국들은 긴장감을 주는 날카로운 사운드에 맞춰 영상의 의도를 더 명확하게 하는 글귀들과 함께 상영된다. 두 개의 화면에 나열되는 단순 이미지들의 리듬은 그 어떠한 스토리텔링보다도 강하고 오랜 기억을 남기며 과거와 현재를 관통한다.

총과 칼처럼 불안하고 서늘한 사운드 사이를 뚫고 "어떤 죽음", "미군과 일본군 그 사이"라는 단어가 화면에 비친다. 제주의 태평양 전쟁 희생자 위령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제의 태평양 전쟁 지정학적 요충지에 흩어져 있는, 이제는 풀숲에 뒤덮인 격납고, 비행장, 벙커들 또한 나타난다. 어떤 죽음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연과 더불어 누구보다도 평화롭게 살아갔을 토착민들은 순식간에 식민지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강제로 동원된 그들의 손에서 건설된 활주로는 시간이 지난 지금 자연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전쟁의 잔재들은 미래의 사람들이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기념비들 덕에 간신히 존재감을 붙잡는다.

약 12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이 작품은 발길을 멈추기에 충분했고 비디오가 끝나고 나면 이내 지금 비디오가 송출되고 있는 이곳은 그 당시 일본과 동맹을 맺었던 독일임을 상기시키는 순간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키바위쿠르르는 역사의식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문명과 함께하는 자연 현상에 대해 주목하게 한다. 영상은 과거의 이야기를 하지만 현재의 이미지들을 보여주며 역사와 자연 두 가지 모두를 담는다. 문명을 세우기 위해 파괴되지만 끝내 인간의 문명에 적응하는 자연은 시간이 지나 역사를 넘어 그들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인간사에서 한 획을 그을 정도로 중요했던 인간들의 발자취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숲과 바다, 생태계 즉 자연 안에서 이루어지며 결국엔 그들에게 잠식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Monument, 2022

끝난 영상을 뒤로하고 상영실을 나갈 때면 위의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모뉴먼트, 기념비.

전쟁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강제 동원되어 팔라우 섬이나 보크사이트나 인산염 광산으로 끌려갔다. 미크로네시아와 오키나와 원주민들도 같은 운명 길을 걸었다. 침묵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이 기념비들은 그들을 추모하고 있다. 누구를 기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로 인해 이름 모를 더 많은 이들의 슬픔을 달래주고 있는 듯하다.

세 기념비들의 재료로 눈을 돌려본다. 붉은 벽돌 같은 흙은 보크사이트, 회색은 인산염, 검은흙은 해조류인 감태의 재로 만들어졌다. 모두 강제 동원된 이들의 마지막이었을 수도 있는 장소와 의미를 함께하는 재료들이다. 감태의 경우 그 당시 해녀들이 일본군의 폭탄 제조를 위해 감태를 공급했다고 한다.

Seaweed Story, 2022 (Photo 1 : Haupt & Binder, Universes in Universe)

상영관의 커튼을 지나오면 해녀들이 부르는 아리랑이 가득한 방을 마주한다. 한국인이라면 제주의 집을 표현했구나 단번에 알 수 있는 제주식 돌집이 방 한가운데 해초 조형물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제주의 마을 하도를 표현한 이 작품은 해녀 합창단의 아리랑과 함께하며 비록 독일이지만 내 집, 한국에 와있는 듯한 포근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2022년은 제주해녀 항일운동 9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힐링을 위해 가는 휴양지 제주는 오키나와와 괌처럼 여전히 전쟁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제주를 해녀들은 아리랑으로 위로하고 있다.


바다의 농부, 해녀. 그들은 서로를 바다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반자로 생각한다. 전국에서 유일한 여성 주도의 항일 운동과 전국 최대의 어민운동인 해녀 항일운동을 전개할 만큼 제주는 그들의 커뮤니티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마을 하도에서 해녀 항일 운동이 제일 활발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이끼바위쿠르르는 그런 제주 하도 마을의 해녀들의 쉼터를 축소해 독일 카셀에 데리고 왔다. 탈의실  해녀들의 사랑방이 현재는 건물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장소의 초기 형태는 해녀들이 손수 돌담을 쌓아 만든 노천 쉼터 불턱이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해녀들의 복지환경이 나아지며 현대식 건물의 형태를 갖추었고 불턱은 문화유산이 되었다.

이쯤에서 제목을 다시 보니 Seaweed Story, 해초 이야기이다. 생명력 강하고 밟아도 잘 자라는 잡초처럼, 바다의 잡초 해초는 생명력 강한 제주 해녀들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일제 강점기와 태평양 전쟁 당시 받았던 온갖 수모, 어떤 이유에서든지 강제로 동원된 그들의 지나간 그늘을 뒤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권을 찾기 위해 맞서 싸워온 모든 이들에게 가슴 깊이 감사를 전한다.

해외에 나와 살면서 절실히 느낀 것 중 하나는 우리가 배워 온 우리의 역사는 전 세계 사람들과 공유되는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사는 모두의 것이지만 동양의 이름 모르던 나라 한국의 역사는 진지하게 한국 문화에 관심 있는 외국인이어도 잘 모르기 일쑤였는데 작품을 통해 잊혀 가던 이야기들을 다양한 관람객이 찾는 카셀 도큐멘타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제주에 가게 되면 해녀 박물관과 해녀 항일운동 기념공원에 방문해야겠다.

해녀들의 아리랑

그리고 2022년 7월, 카셀 주립대는 캠퍼스 내 소녀상 영구 설치를 결정했다.

출처 : 연합뉴스
역사는 자신들이 짊어져야 할 집합적인 기억이며 아무리 감춰도 반드시 밖으로 나온다.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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