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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수진 Jul 29. 2022

처음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다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제일 처음의 순간을 떠올리곤 한다. 마치 1등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듯 창창한 앞날만을 상상하며 여러 가지 다짐을 하던 그 순간을. 초심이라는 단어는 내 손에 타임머신을 쥐어주며 위기 속에서 나를 다시 한번 건져 올려낸다. 이 초심을 찾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가보니 온전히 혼자 이탈리아에 도착해 스스로 '내 집'을 구하면서 시작된다.


대학 입학을 위해 인천에서 파리를 경유해 토리노로 들어왔다. 

입국 전 한국에서 이탈리아 부동산 사이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토리노 집주인들에게 연락을 해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돌아온 연락은 없었다.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가 온 연락들은 미리 1년 치 월세를 보내주면 계약서를 써 주겠다는 사기성 부동산부터 원룸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제시하는 집주인까지로 다양했다. 이쯤 되니 일단 가서 부딪혀보자는 생각뿐이었고 당장 지낼 곳은 에어비앤비에서 구했으니 급할 것도 없었다. 집이 없다는 생각보다는 이탈리아에 다시 간다는 자체가 설렘을 가져다주었으니까. 


9월로 접어드는 가을길에 내린 얇은 빗줄기가 비교적 쌀쌀한 공기를 가져다주었지만 여전히 이탈리아는 여름이라 할만한 일조량을 내뿜었다. 찬란할 정도로 눈이 부시고 뜨거운 이탈리아의 여름 햇빛. 

처음 이곳에 여행을 왔을 때 로마에서 마주한 햇빛은 모든 것을 다 태울 심산으로 내리쬐고 습도가 낮은 탓에 건조함을 느끼게 했다. 그 바삭한 여름의 햇빛을 토리노에서 다시 느끼니 무엇이든 해낼 것만 같았던 기분이 들었다. 

외출 전 선크림을 바르며 "그래, 내가 이 햇빛에 반해 여길 왔지" 라며 15년쯤 된 부부가 할 것 같은 멘트도 날려보았다. 여기가 바로 내가 반한 그 이탈리아가 맞다. 


다시 집 매물 공고를 보며 집주인들에게 연락 돌리기를 하루 이틀. 몇 주 전 한국에서 연락했었던 집주인 중 한 명에게 아직 집이 비어있다면 내일 당장 집을 보러 가도 되겠냐고 문자를 보냈다. 기다렸다는 듯 답장이 오고 다음날 바로 집을 보러 갔다. 

로마 월세의 반값이라는 괜찮은 가격에 방금 리모델링을 마친 깔끔한 내부 그리고 걸어서 강의실까지 갈 수 있는 위치. 왜 아직도 빈 방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이보다 더 좋은 집은 없겠다 싶어 남들에게 뺏길까 바로 그날 계약을 하자고 했다. 


스물 후반, 한국에서도 자취라곤 해 본 적 없는 내가 처음으로 월세방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에어비앤비 숙소 예약이 끝나는 날 곧장 짐을 싸들고 택시를 탔다. 상아색과 노란색, 살구색, 회색이 뒤섞인 토리노의 건물들을 지나 앞으로 '내 집'이 될 곳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30킬로에 육박하는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 5층 같은 4층 집 앞에 도착해 숨을 내쉬니 내가 정말 이탈리아에 있구나를 실감했다. 

4층 계단이 대수랴! 외국인이 집 구하기 까다로운 이탈리아에서 이렇게나 편하게 빨리 집을 구하다니! 


다른 사람들과 달리 처음부터 연락이 잘 됐던 집주인 프란체스코는 이제 막 캐리어를 내려놓은 나에게 룸메이트를 소개했다. 갓 스무 살이 된 중국 여자 아이는 자신을 테레사라고 부르라고 했다. 

짐을 풀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프란체스코가 연락이 잘 됐던 이유가 있었다. 나보다 조금 먼저 이 집에 도착해 살고 있던 테레사와 집주인의 중국인 와이프가 한국인인 내가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도록 적극 추천했다는 것. 알고 보니 테레사는 나보다 더 한국 아이돌에 빠삭한 케이팝 팬이자 아미였고 와이프 크리스티나는 화장품 설화수와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있었던 것이다. 

마음에 쏙 드는 내 집이 생겼다는 안정감이 나를 감쌌다. 더 나아가 연고 없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우연히 보내 본 문자로 집을 구하고 내가 꼭 이 집에 들어왔으면 했다는 사람들을 만나다니 이렇게 감사할 수가. 침대에 누우니 그동안의 걱정은 물러가고 기대감이 들었다. 이 집에서의 생활도, 대학 생활도 즐거울 거란 기대감. 이제 하고 싶은 공부만 열심히 하면 어려울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혹시 여기서 운을 다 써버린 거 아닐까?



도착하자마자 찍은 내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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