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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하 Apr 29. 2024

가리가리 불가리 이야기-part 2

ft. 눈물의 여왕

불안돈목(佛眼豚目).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부처로 보이고,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추하게 보인다는 말. 그날 이후 이 심오한 사자성어는, ‘불가리를 영접한 눈엔 불가리만 보인다’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 영롱함, 그 반짝임. 그래서 나는, 우선 길 가다 마주치는 예쁜 여자들의 손과, 귀와, 목을 살폈다. 이 불가리란 녀석은 평소 내가 소비하던 물건의 가격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고 나에게도 일말의 양심이란 게 있으니, 어떻게든 요 녀석을 집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서는 ‘나만 없어 불가리’라는 명목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리를 한 사람들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은 보석 보기를 돌같이 했다. 나의 끓어오르는 마음을 표현했다간 정신 차리라는 말을 들을 게 뻔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그날 백화점에서 만난 세상은 현실이 아니었나? 이 요망한 불가리는 뽀로로 친구 루피가 주얼리를 주렁주렁 달고 활짝 웃고 있는 이모티콘까지 사방에 뿌려대는 판에 말이다. 루피도 하고 다니는 불가리를, 내가 왜 못해?      


그렇다면 사이버 세계로! 검색을 시작했다. 백화점 구매 인증샷과 상품권 할인 팁 글을 읽어나가고 있는데, 눈이 번쩍 떠지는 글이 보이기 시작했다. 화려한 목걸이 사진을 내세우며 진품과 똑같은 퀄리티라고, 자세한 내용은 비밀 댓글로 문의하라는 흡사 마약 판매글 같은 은밀한 블로그 글부터, 사춘기 호르몬에 날뛰는 아이의 돌반지를 종로에서 불가리 반지로 바꾸고 나니 속이 뻥 뚫리더라는 글까지...가만 있어 보자. 돌반지? 종로? 와...우리 딸은 다 계획이 있었다. 결국 네가 이렇게 효도를 하는구나! 바로 이거였다! 종로! 무쓸모 돌반지를 명품 디자인으로 만들어 준다는 곳! 심지어 금 함량은 정품보다 더 많다니, 디자인과 금값을 동시에 챙기는 진정 합리적이고 현명한 구매 아닌가.      


다시 돌아온 주말, 모든 사건의 시작인 효녀 딸아이의 돌반지를 챙겨 남편과 종로의 한 귀금속센터 건물로 향했다. 북적대는 사람들 틈새에서 가게 주인에게 ‘불가리 있어요?’를 물었다. 없단다. 이상하다. 분명히 이 건물에서 샀다는 글을 읽었는데? 남편과 건물 밖으로 나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들어가서 조용히 사진을 내밀었더니, 이번엔 통했다. 그제서야 사장님은, 빛조차 들지 않던 창세기 이전의 공간에서 최초로 불을 밝히듯,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 구석에서 상장 케이스를 꺼내더니 내 앞에 펼쳤다. 그러자, 화면으로 학습한 온갖 브랜드의 목걸이가 주루룩, 위엄을 드러냈다!       


아, 그중에서도 나의 불가리는, 독보적이었다. 일주일 전에 본 반짝임과 기품까지 똑같은데  가격은 진품의 5분의 1, 안 사면 손해였다. 갖고 있던 돌반지를 주고 새 제품으로 돌려받으면 된다니 이것은 마치 물물교환 같기도 했다. 사장님은 눈과 코를 벌름거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나에게, “사람들이 우리 물건 보고 나면 롯데 본점 가서 예약한 거 다~ 취소하고 여기서 다시 사가. 언니 그거 진품으로 사는 거 진짜 돈 ㅈㄹ이야.”라며 구매를 부추겼다. 한없이 얇은 귀를 가진 나는, 역시 사람은 평생 배우며 살아야 한다고, 새로운 분야에 야무지게 발을 들여놓은 스스로를 칭찬하며 반지 팔찌 목걸이 3종 세트를 호기롭게 주문했다. 다만, 겁 없이 사장님에게 돌반지를 던지는 나를 이번에도 벌레 보듯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이 느껴져서, 다시 한 번 쇼핑엔 남편과 동행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일주일 후 주문한 종로표 불가리가 도착했다. 역시 그간 하고 다니던 도금 제품들과는 달랐다. 목걸이를 걸고 거울을 보니 반짝, 반지 낀 손을 허공에 휘저으면 또 반짝, 얼굴엔 형광등이 켜지고 목에 힘도 더 들어갔다. 출근해서 울컥 화나는 일이 있을 때 목걸이를 움켜 쥐면 화도 스르르 풀렸으니, 과연 묵주 반지보다도 강력했다. 이쯤 되면 ‘Manner maketh man.’이 아니라 ‘Jewelry maketh woman.’인 셈이었다!      


 몇 달 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그런데 그 친구의 팔에 내가 산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불가리 팔찌가 달랑거리고 있지 않은가? “어, 팔찌 샀네? 예쁘다! 언제 샀어?”라는 내 물음에 친구가 답했다. “어, 이거, 내가 산 게 아니고, 남편이 선물로 사 왔어.”


‘남편이 선물로 사 왔어. 남편이 선물로 사 왔어...’ 그렇다. 보석을 돌 보듯 하는 내 친구와는 달리, 친구의 남편은 보석을 보석 보듯 하는 사람이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사업을 시작한 그는, 수년 간 어려운 시기를 묵묵히 함께 견뎌준 아내를 생각하며, 큰 맘 먹고 직접 매장에 가서 그 예쁜 팔찌를 깜짝 선물로 사온 것이다.      


따뜻한 사연을 들으며 뭉클한 마음으로 팔찌를 찬찬히 구경했는데, 아...친구의 불가리는 내가 가진 종로표 불가리, ‘종가리’와 달랐다. 그 차이는 너무나 미묘해서, 불가리 매장을 딱 한 번만 방문했던 나는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던, 하지만 종가리 팔찌를 매일같이 꿀 떨어진 눈으로 관찰한 지금의 내 눈은 구분해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체인의 굵기, 꼬임, 장식 모두 묘하게 달랐다. 불가리의 팔찌를 ‘섬세함’이라 한다면, 나의 종가리는 ‘조악함, 씩씩함’이었다. 사실, 똑같으면 그게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시무룩해진 나는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했다. 특히 그 불가리 팔찌는, 친구 남편이 매장에서 사 왔다는 것을 강조했다. 조용히 내 말을 듣던 남편이 말했다.

“안 되겠다. 우리 가자!” ‘응?’ 심장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나도?’

남편이 말했다. “종로에 따지러 가자. 똑같이 만들어 준다며? 안 똑같잖아. 이건 안될 일이잖아. 하하하.”

어휴...그럼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날 이후 내가 그토록 아끼던 종가리는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분명 금인데, 목에 걸어도 팔에 차도, 내 마음은 어쩐지 불편하고 쭈글거렸다. 이게 바로 모조품을 쓸 때의 느낌인 건가. 봄의 찬란함을 잃어버린 듯 나의 종가리는 빛을 잃었고, 나는 더욱 쓸쓸해졌다. 결국, 옷장 깊숙히 있던 딸아이의 돌반지처럼, 나의 종가리도 조용히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도 눈물의 여왕에서는 김수현이 김지원에게 불가리 프로포즈 반지를 건넸다. 결혼하고 내내 끼고 있던 불가리 반지는 어디로 내팽개치고, 이혼하더니 이혼 취소라며 또 새 반지를 내민다. 이를 거절한 김지원은 뒤늦게 김수현 몰래 반지를 쓰다듬으며 “컷팅은 역시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이라며 흐뭇해 하는데, 김수현은 거절당했으니 반지를 환불하겠다고 난리난리.      


재벌들도 쓰다듬다가 환불한다며 난리 법석인, 어쩌다 내가 짝사랑하게 된 불가리, 콧대가 하늘 높이 올라 1년에 두 번 씩이나 가격 인상을 하고 있다. 마침 금값도 계속 오르고 있다. 서랍에서 자고 있는 나의 18K 종가리 가격도 오르고 있으려나. 언젠가 이 아이를 종로에 데리고 가서 더 예쁜 제품으로 부활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종가리 말고 다른 걸로. 어느 것의 모조품도 아닌 내 눈에 예쁜 디자인으로...아니면 팔고 그 돈으로 진짜 불가리로. 아...고민은 계속된다. 진짜 기다려라. 불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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