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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씨 Jul 26. 2022

오랜 연애의 끝

사랑한다는 말이 배고프다는 말보다 쉽게 튀어나올 때나 그 어떤 두근거림이나 설렘 없이 집 앞 슈퍼에 가듯 일상처럼 너의 집에 가고 있는 날 볼 때,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이 관계를 끝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결심을 해본다. "사랑"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맨 처음 시작이 이성의 분석으로 그토록 뜨겁게 달궈졌던 게 아니었던 것처럼 그 끝 역시 마음이 먼저 머리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면 나의 뇌는 호르몬 분비를 정지시키고 어째서 우리가 헤어져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변명들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당장 너에게 헤어지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아직 널 사랑하는 여운, 혹은 뜨뜻미지근한 감정의 찌꺼기에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이토록 긴 시간을 함께 보냈던 너를 보내고 난 뒤에 과연 또다시 누군가를 만나고 이만큼의 시간을 견디며 사랑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리고 아직은 한여름의 장맛비처럼 순식간에 나를 (오래도록) 잠식할 외로움을 맞이할 준비가 덜 끝났기 때문이다.

 

너를 걱정하는 마음도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스스로의 안위를 더 많이 걱정하는 나를 보면 넌 아마 실망하고 말겠지. 어제까지도 사랑한다 고백했던 나에게 그럴 리가 없다며 다그치거나, 진실도 거짓이라 몰아붙이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겠지.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내 입과 손이 가면을 쓰고 제멋대로 널 만져도 결국 마음까지 속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네가 나를 잡는다면 나는 아마 이곳에 조금 더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못 이기는 척, 마치 너를 위해서인 것처럼 나는 네 곁에 남아 마음을 추스르고 떠나갈 때를 기다리며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러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너를 떠나거나 온전히 내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순간이 오면 자유를 찾아 네가 쫓아오지 못하도록 멀리 날아가 버릴 테지.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도저히 홀로서기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나는 또다시 적당한 핑곗거리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래도 익숙한 너를 내 곁에 두는 게, 이런저런 단점들까지 모두 떠안고 여전히 나를 봐주는 네가 더 나은 것 아니겠냐고. 언젠가처럼 다시 맘 설레 잠 못 이루는 날이 온다한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사랑"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며 현실에 주저앉아 거짓 감정을 담보로 당장의 편리함과 편안함과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다시 주섬주섬 짐가방을 풀고 네 곁에 남겠다는 확신을 주고 나면 너는 잠시 불안함을 거두고 한동안은 꺼지지 않는 알람시계처럼 나를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결국 머지않아 우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는 그러지 말자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곤 하하하 한 번 웃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어떻게든 견딜 수는 있겠지만 우린 언제까지 이 무료함과 빈 가슴을 안고 서로의 곁에 남을 수 있을까. 이미 한 번 떠나간 나를, 너는 밤마다 떠올리며 불안해하겠지. 어쩌면 너 역시 나를 먼저 떠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와 나는 너무 나약해서 이젠 둘이 아닌 혼자 서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 같아. 그런 네가, 그리고 그런 내가 가엽고 안타까워서 미칠 것만 같다. 오랜 연애...... 결코 오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치명적인 덫. 20대 초반에는 평생을 한 사람만 사랑하며 살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고, 20대 중반에는 결코 한 사람만 사랑하며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30대에 이르러 앎을 실천으로 옮기려 했을 땐 모든 게 너무 멀어져 있었다. 언젠가 나를 사랑한다 몰래 고백해주었던 몇몇 사람들도, 당당하게 사랑할 수 있었던 용기도, 현실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자신감도, 독신으로 살아도 멋지게 살아갈 거라는 의지도...... 너와 나는 마주 볼 수 없이 붙어 있는 샴쌍둥이처럼 그렇게 떨어지지도 못하고 앞만 보며 걸어간다. 그런 너와 나의 모습이 눈물겹다.


2008.12.29

수년 전에 쓴 글을 다시 꺼내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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