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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씨 Aug 04. 2022

그날의 너



  고등학교 1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갑자기 반을 옮겨 수업을 듣게 되었다. 당시 학년 주임이었던 수학 선생님의 야심 찬 계획 때문이었는데 1학년생 전체를 수학 성적대로 나눠서 수준별 수업을 한다고 했다. 당시엔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훨씬 많아서 맨 끝 교실은 남학생만으로 한 반을 만들었는데 나는 그 교실로 가야 했다. 다들 불만에 찬 얼굴로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혹시나 타 반에서 온 아이가 자신의 물건을 만질까 봐 책상 서랍에서 물건을 꺼내 사물함으로 옮기는 아이도 있었다. 내 짝꿍인 K도 나와 같은 반으로 가게 되었는데 우리는 특별히 치울 것도 없고 소란스러운 것도 싫어서 먼저 맨 끝 교실 앞으로 가서 그 반 아이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수학책과 샤프 하나, 공책 한 권을 팔에 끼고 복도 창틀에 기대어 서서 교실 안이 정리되길 기다리는데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애는 피부가 하얗고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컸는데 교복 와이셔츠가 방금 다림질을 끝낸 것처럼 빳빳하고 깔끔했다. 부산스러운 교실 안에서 혼자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말없이 서 있었다. 잠깐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그냥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있었고 빛은 그 아이 쪽으로 내리쬐고 있었으므로 내가 보일 리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겨우 교실로 들어갔지만 이미 그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정신없던 틈에 이미 다른 교실로 간 것 같았다. 그 아이의 자리에 앉아보고 싶었는데 어디인지 알 수도 없고 마땅히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아쉬운 대로 그 아이가 서 있던 곳 근처에 앉았다. 곧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이동 수업 첫날이라 정식으로 진도를 나가지는 않았고 대충 오리엔테이션 같은 걸 했던 것 같다. 그 애의 모습은 작은 표정부터 옷깃 모양까지 또렷하게 떠오르는데 선생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한 번 봤을 뿐인데 계속 그 아이의 모습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오자마자 K에게 그 애에 대해 물었다. K는 남자니까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5반에 얼굴 하얗고 키 큰 애… 이름이 뭐야?”

  K는 아직 한참 덜 자란 열일곱 살 남학생답지 않게 눈치가 빨랐다. 바로 다음 쉬는 시간에 맨 끝 교실로 가서 그 애에게 내 얘기를 했던 것을 보면.


  K는 교실로 돌아오면서부터 이미 거들먹거리고 있었는데 그 꼴이 싫지만은 않았다. 내가 좋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 애를 찾아갔느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내심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짐짓  모른 체 했다. K는 대뜸 ‘걔는 너 알고 있던데?’라고 했다. 자신이 맨 끝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오히려 그 애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반 아니냐면서 내 이름을 물어봤다고 했다. 내가 잠자코 있으니까 K는 맨입으로 말해줄 수는 없다면서 시간을 끌었다. 결국 매점에 가서 배를 채운 뒤에야 내일 정규 수업이 끝나면 작은 운동장 쪽으로 가보라고 말했다. 그 애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K는 그 아이의 이름은 S고 다른 지역에서 중학교를 다녔다고 알려주었다. 어쩐지, 이 좁은 지역에서 저렇게 잘생긴 아이를 오늘 처음 봤다는 게 그제야 이해가 됐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나는 너무나 평범해서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나를 알고 있었을까. 내일 보자고 하는 게 무슨 뜻인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냥 호기심일 수도 있을 것이고, 시작도 하기 전에 거절하러 나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쩐지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고민을 한다고 해서 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은 몹시도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흘렀다. 시간처럼 내 마음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S는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나를 알고 있을까, 그냥 없던 일로 할까?


  당시에도 휴대폰은 있었지만 학생들은 대부분 삐삐를 가지고 다닐 때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나가는 것 말고는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S의 교실 앞으로 찾아가거나 K를 통해 말을 전할 수도 있었지만 둘 다 내키지 않았다. 마음은 초조해도 그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머뭇거리다가 떨리는 마음으로 그 애를 만나러 갔다. 손바닥으로 심장을 막아보아도 두근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지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했고 마른 입술이 달싹거렸다.

  운동장 한켠의 벤치 앞에 그 애가 있었다. 나를 보고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동작으로 손을 들었다가 쑥스럽다는 듯 얼른 내렸다. 나는 그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잘 걷던 걸음걸이마저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직 여름의 열기가 남았는지 해 질 녘 노을에 내 볼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이렇게 어쩔 줄 몰라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부끄러워서 점점 더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그 애는 여전히 주름이 없는 깨끗한 셔츠를 입고 반쯤 풀은 넥타이를 목에 걸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나보다 두 뼘은 더 큰 것 같았다. 여전히 하얀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딸기 우유를 건넸다.

  “전에 보니까 이거 마시고 있길래.”

  우유를 받아 들긴 했는데 목이 메인 사람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희미하게 ‘고마워’라고 했지만 그 애의 귀에 들렸을지는 모르겠다.

  “어제 수업 시작하기 전에 K랑 복도에 서 있었지?”

  눈이 마주친 건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전부터 너 알고 있었어.”

  그 애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눈빛이 따스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운동장을 바라봤다. 예닐곱 명쯤 되는 남자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동네 꼬마 아이들처럼 즐거워 보였다.

  “어떻게?”

  “복도 지나가다가 우연히 봤어.”

  “그건 그냥 지나친 거잖아.”

  “한 번 보고 나니까 자꾸 보이더라. 너네 반 앞을 지나갈 때나… 체육 시간에 운동장 나왔을 때도….”

  그는 땀이 나는지 손을 바지에 쓱쓱 닦았다. 깨끗한 손이었다. 손가락이 길고 가지런했다.  

  “별로 기억에 남을 얼굴이 아닌데….”

  “기억나더라… 예뻐서.”

  몇 초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순간 얼굴이 너무 빨개져서 그대로 터져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그 애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 애의 목소리와 눈빛이 넓은 파동이 되어 내 마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멀리서 축구하던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가을바람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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