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가 좋아할 팔자
여기 사주카페가 아니라 변호사 사무실이었나?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드라마에서나 보았을 법한 커리어우먼 분위기였다. 단정한 검은색 슈트를 입은 역술가님 앞에 앉아있으려니 사주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인생 컨설팅을 받으러 온 것 같았다. 그런데 어찌 보면 사주와 인생컨설팅. 비슷한 말일수도 있지 않을까?
“안녕하세요? 저는 김소명이라고 합니다.”
손때 묻은 작은 책과 흰 종이가 끼워진 클립보드를 내여놓으며 역술가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우리는 차를 조금씩 홀짝이며 최대한 태연한 척, 연희를 쳐다보았다.
얼른 시작해 보라며, 세연과 나는 눈으로 그녀를 재촉했다.
연희는 의자에서 몸을 좀 세우더니 역술가를 바라보며
"저, 올해 연애운 좀 봐주세요." 하고 자연스럽게 ‘점을 보기 시작했다.’ 20대 한창나이였던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연애였다.
생년월일을 받아 적은 역술가는 익숙하게 책을 펼치더니 몇 가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이야기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몇 가지 질문과 대답이 오가며 연희는 올해 멋진 운명의 상대를 만나 연애를 시작하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세연과 나는 눈이 동그래지며 마치 수업을 듣듯 신중하게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저장했다.
연희의 질문이 끝나자 역술가는 “다음은..”하고 옆에 앉아있던 나를 쳐다본다. "보시겠어요?
은연중에 눈으로 순서를 정해주었다.
드디어 내 차례다!
"어떤 게 궁금하세요?"
내 생년월일을 새로운 종이에 받아쓰던 역술가의 말에
아까부터 외워놓았던 질문을..
"저.. 결혼은 할 수 있을까요?"
미친!! 이렇게 돌직구를 날리려던 게 아니었는데!! 입이 제멋대로 말해버렸다.
뇌에 저장해 놓은 질문거리들 중 하나를 골라 입으로 전달하는 그 찰나의 순간.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입이 먼저 본심을 말해버렸다.
나는 이렇게나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었구나. 당혹스러웠다. 친구들도 당황했는지 서로를 쳐다보았고, 역술가님은 예쁜 얼굴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웃겼을까? 싶은 생각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역술가는 잠시 펜을 놓고 양손을 깍지 끼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혹시 독심술도 하시는 건 아닐까??
"네. 희진 씨 결혼운 있어요."
다행이다! 결혼은 하는구나! 그럼 연애는..
"언제요?"
맙소사!!
역술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되묻고 말았다. 오늘 내 입이 왜 이러는 걸까? 도무지 컨트롤이 안된다. 내 몸의 한 부분이 아니라 마치 다른 생명체라도 된 것처럼 제멋대로행동하고 있었다.
내가 봐도 내가 결혼에 환장한 여자처럼 보였다.
이쯤 되면 이미지 관리는 이미 물 건너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맘 편히 물어볼 거 다 믈어보고 가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운 법이다.
"대신 결혼은 늦게 할수록 좋아요."
"네? 제 팔자가 그래요?"
“아니, 내 경험상 그렇다고요.”
‘???‘
역술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근데 여기 보면 진짜 그렇게 나와요. 늦게 할수록 좋다고. “
역술가의 농담에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이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싶다.
”아.. 그렇구나. 그래도 하긴 하네요. “
얼굴에 실망한 티가 그리도 나는지 역술가가 나를 위로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실망했어요? 왜 그렇게 실망해요. 결혼 그거 생각보다 그렇게 좋지만은 않아요.”
이야기를 듣던 남편이 갑자기 맥주 캔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서 결국 늦게 늦게 나랑 결혼했구나?"
짠!
맥주 한 모금이 시원하게 목을 거쳐 넘어간다. 취기가 살짝 오르니 기분도 좋아지고, 아까의 복권 사건에 대한 충격도 많이 사라졌다.
"그러게. 그렇게 됐네? 그 말 때문에 결혼이 늦어진 건 아닌데, 그래도 우리 결혼 진짜 늦게 했잖아. 그거 생각하면 좀 소름이야. "
"그래? 그냥 지나고 생각하니까 맞춰진 건 아닐까? 그래서? 그 사람이 또 뭐라고 했어?"
얘기를 하다 보니 좀 창피했지만 남편의 재촉에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말이야.
"결혼을 일찍 할 수도 있기는 해요. 근데 그럼 헤어질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늦게, 웬만하면 ‘최대한’ 늦게 하는 게 좋아요."
"일찍 결혼하면 이혼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네"
너무 단호한 대답이었다. 순간 TV속 드라마를 보는 상상이 됐다. 내 인생은 이미 소설처럼 짜여 있고 나는 거기에 맞춰 연기하고 있다. 그 드라마를 저 역술가가 보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상상력을 동원하는 사이 다시 사주풀이가 이어진다. 이어지는 말이 더 기가 막히다.
"희진 씨는 시어머니가 참 좋아하겠어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연애운을 봐달랬더니 왜 시어머니와 궁합을 봐주고 있는 걸까, 그리고 얘기를 듣다 보니 질문은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알아서 다 설명해 주는데 왜 걱정을 했을까.
황당해하는 내 얼굴을 본 역술가는 이번엔 종이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비스듬한 네모를 그리더니 그 위에 앉아있는 사람을 그렸다.
"희진 씨 사주를 보면 희진 씨는 방석 같은 사람이에요."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내 사주가 방석사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