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 모든 만남은 성숙의 뿌리가 된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때문에 인내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배움을 얻기도 한다.
나 또한 최근 여러 모임에 나가며 다양한 직업과 삶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항상 모든 사람이 나와 잘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수록 ‘저 사람은 저렇게 느끼는구나’ ‘이 사람은 또 다르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되고 그 과정에서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과 사고의 폭이 함께 넓어지는 것 같다.
생각의 폭이 넓어지면 누구도 완전히 옳거나 그르지 않게 보인다. 또한 내가 부족한 부분은 어떤 사람은 가장 뛰어난 부분이고, 내가 뛰어난 부분은 그 사람에게 부족한 부분일 수 있다. 사람마다 성숙한 부분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누군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기다려주는 게 필요하고, 또 내가 성숙하지 못할 때도 스스로를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해야 하는 부분이 다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다. 각자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따라 성장의 시기와 방식은 달라진다. 결국 성숙의 차이는 나이를 얼마나 먹었느냐가 아니라, 삶에서 마주한 다양한 ‘환경’과 ‘사건’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 왔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헤르만 헤세의 책 <싯다르타>에서 오랜만에 고빈다를 만난 싯다는 자신을 올바르게 가르쳤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부유한 상인과 노름꾼, 자신이 사랑했던 매춘부, 강가에서 만난 사람들까지도 모두 자신의 ‘스승’이라고 불렀다. 고빈다는 싯다가 농담을 즐긴다고 말했지만, 결국 싯다는 그가 평생 수행했음에도 도달하지 못했던 열반에 이르게 된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웠을 사람들도 스승으로 여겼다. <싯다르타>에서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고빈다가 그를 바라본 모습은 이렇게 묘사된다.
그는 친구 싯다르타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못했고, 그 대신에 다른 사람들의 얼굴들, 수많은 얼굴들, 일련의 길게 늘어선 얼굴들, 수백, 수천의 얼굴들이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보았다. 그 모든 얼굴들은 왔다가 사라졌고, 모든 얼굴이 동시에 현존하는 것 같았다. 모든 얼굴은 끊임없이 변하여 새롭게 되었다. 그렇지만 모두 싯다르타의 얼굴이었다. - <싯다르타> 204p
결국 그가 만났던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은 그를 열반에 이르게 한 스승이었고, 그는 그 얼굴들을 자신 안에 품게 되었다. 이는 추상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그의 죽음 묘사 속에서 그 가치관이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현대 사회를 살아가다 보면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도 많고, 가능하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바꿔보자.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에는 이전에 유순하고 온순한 성격이었지만,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서 오히려 성격이 단단하고 강해졌다.
그 사람들을 겪었기에 지금까지 인내하며 버틸 수 있었고 그 과정 자체로 그들은 나에게 ‘인내’를 가르쳐 준 스승이 되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 뼘 성장한 것이며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를 갖추게 된 셈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배움은 언제나 쉽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성찰하게 되면 그때는 몰랐던 깨달음이 반드시 하나쯤은 남아 있다. ‘진정한 배움’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정해진 때가 없고, 뒤늦게라도 스스로 깨닫는 순간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도 모두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내 의견을 강요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배움의 시작이며,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나아간다면 우리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고, 포근한 그늘이 되어 마치 스승처럼 함께하는 이들을 지켜주는 존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