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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vory Nov 14. 2023

'미안해'의 함정에 빠지다

feat. 뭐가 미안한데?

"사과를 하기도 지치는 것 같네요. 항상 사과하는 사람이 정해져있는 것 같아요."


20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유지해 온 성태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잘못한 건 알아요. 결혼 초부터 와이프 속 썩였고, 거짓말도 많이 했던 거 인정해요. 저는 이제 더이상 싸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무조건 사과하는데, 언젠가부터 저만 사과하고 있습니다. 애들도 와이프도 제가 사과하는 걸 당연시 여기고요. 제가 그렇게까지 잘못했습니까? 말씀드리다보니 그냥 이혼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네요."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부부동반 모임에서 여행을 갔습니다. 전 다투기 싫어서 와이프가 하자는 대로 다 했어요. 여기서 사진 찍고 싶다고 하면 찍어주고,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리고, 짐 들라고 하면 들고. 아이스 커피 마시고 싶었는데 따뜻한 걸로 마시라길래 메뉴도 바꿨어요. 와이프 커피도 아니고, 제 커핀데 제 맘대로 못마셨다고요. 강아지 마냥 따라다니는데 어느샌가 와이프 기분이 안좋아보이더라고요? 왜그런진 모르겠어요. 제가 독심술사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따라갔습니다. 근데 와이프가 모임에 온 다른 부부에 대해 욕을 하더라고요. 다른 친구들은 과일같은 간식을 싸오면 고맙다고 하는데, 걔들은 그냥 당연하게 받아 먹는다나요? 그럼 와이프도 간식 안싸오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전 동의도 안되는데 맞장구 치기도 싫고, 아니라고 말하면 분명히 저한테 화를 낼거거든요.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고 뭐 어쨌든 제가 가운데서 처세를 잘못 한 게 있을테니까 사과를 했어요. 그랬더니 저한테 화를 냅니다. 하... 선생님, 솔직히 말해주세요.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까?"






성태님은 부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분명 많이 노력했습니다. 평소 가족들로부터 '무섭다'는 말을 들었다던 그는 최대한 아내에게 맞추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하자는 대로 무조건 따르고, 다툼이 일어날 것 같으면 먼저 사과했지요. 그런데 웬걸요, 관계는 나아지지 않는듯 했습니다. 잠시 나아질 때도 있었지만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라네요. 왜일까요?



"저는 싸우는 게 싫고 냉전상태가 지속되는 것도 힘들어요. 항상 제가 먼저 손을 내미는데, 와이프는 그에 대해 고마움이 없는 것 같아요. 저도 화나는 게 많은데 억지로 손 내미는 거거든요. 제가 미안하다고 하면 대답이 딱 이거예요. '뭐가 미안한데?' 결국 미안하다고 해봤자 나아지는 게 없어요, 괜히 꼬투리만 잡히지. 이젠 미안하단 소리도 하지 말래요."




급기야 대처법(?ㅎㅎ)까지 나온 '뭐가 미안한데?'


관계를 위해 노력했음에도 나아지는 것 같지 않으니 성태님은 참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분명하고 중요한 건 이겁니다. 미안하지 않을 땐 미안하다고 하지마세요. 더 큰 싸움으로 번질까봐, 귀찮아질까봐 하는 사과는 사과가 아닙니다. 습관적인 사과는 안하느니만 못합니다. 듣는 사람은 당신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왜냐구요? 미안하지 않은데 한 사과였으니까요. 




'미안해'의 부작용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오용, 남용된다면 약을 안쓰느니만 못합니다. 오히려 부작용만 일으킬 뿐이죠. '사과' 역시 그렇습니다. 적절히 활용된다면 관계를 원만하게 만들고, 깊고 단단한 사이가 되는데 도움이 되는 마법의 약이지만, 잘못 사용된다면 이만큼 좋지 않은 처방전도 없습니다. 오남용된 약처럼 많은 부작용을 불러 일으킵니다. 


어떤 부작용이 있을까요? 첫째, 내가 억울해집니다. 피해의식이 생기기 딱좋습니다. '왜 맨날 나만 사과해? 나도 당신 다 마음에 드는거 아니야!' 둘째, 듣는 사람이 화가 납니다. 미안한 것 같지도 않은데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나와의 소통을 차단하고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과 다름 없어 보입니다. '미안해' 대신 '짜장면'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듣기만 해도 짜증나겠죠. 진심 없이 남용되는 '미안해'는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의미 없이 외치는 '짜장면' 그 자체입니다. 셋째, 내가 정말 뭔가 잘못한 것 같은 입장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생각하기에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 저자세겠지, 하게 되는 거지요. 죄는 안지었는데 죄인이 되고 싶다면 '미안해'를 반복해보세요. 넷째, 비언어적인 표현이 격해질 수 있습니다. '미안해', '아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니까?',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하다고 계속 말했잖아!!' ...더이상의 설명은 생략합니다. 





그럼 어떻게 사과해야 할까요?

자신의 마음에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가 지금 상대에게 미안한가? 죄책감이 드는가? 수치심이 드는가? 화가 났는가? 사과하기 전 몇 초 동안 자기의 마음을 스캔해보세요.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그때 표현하세요. 잠시 멈춰 생각한 뒤 사과하는 것은 사과의 효과를 극대화 시켜주고 진정성을 전달하는 효과도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인위적으로 몇 초를 세고 사과 하는건, 그 자체로 이미 진정성이 떨어지는 행위니 안됩니다. 나의 얕은 수상대는 귀신같이 알아차릴 거예요.) 



다음으로는 상대의 마음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상대방이 어떤 심정일지 헤아려보세요. 역지사지의 자세를 갖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역지사지를 노력해봤는데도 여전히 미안하지 않나요? 어쩌면 이런 상황이 더 많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과하기 전에,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보세요. 내가 상대의 입장이나 상황을 오해하고 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도 왜 상대가 화가 났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면, 사과하지 마세요. 대화하세요.




그럼 제가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요?
와이프 신경에 거슬리지 않으려면 사과하는 수밖에 없는데요.

성태님은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하며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해답은 다르지 않습니다. 상대의 마음에 주의를 기울여보고 공감하면 됩니다. "그 부부가 고맙다는 표현을 안해줘서 당신이 속상했겠네." 진심 없는 사과보다 훨씬 마음을 알아주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다만 기계적인 사과만큼 기계적인 공감도 좋지 않습니다. 잠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해보세요. 그만한 값어치가 있을 거예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건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내 자아가 공격당하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사과를 할 수 있으니까요. 이미 용기를 낸 것 만으로 훌륭합니다. 적절한 사과는 당신의 관계를 더욱 부드럽고 원만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P.S 

한가지 더, 무조건 상대에게 맞추려는 태도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아이스 커피가 좋고, 따뜻한 커피가 싫다면 아이스 커피를 마시겠다고 하세요. 그렇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는 상호적이어서 내가 아무리 공감적인 태도를 위해 노력하더라도 다툼이 생길 수 있어요. 이는 어쩔 수 없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빠른 사과로 무마하기보다는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썸네일 이미지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LZoC4z2A_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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