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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vory Aug 22. 2023

비합리적으로 돌아가는 세상도 필요하다

자기 앞의 생│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인간의 마음만큼 제멋대로인 것도 없을 것이다. 어제 좋았던 사람이 오늘은 싫어지는 변덕을 부리고,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론 와닿지 않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지. 그뿐인가? 더한 것들도 참아냈으면서 '별것도 아닌 것'에 폭발한다. 극히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사소한 사건 하나에 엄청난 힘을 얻기도 하고, 절망적인 트라우마 속에서도 놀라운 생존을 하는가 하면, 사소한 일로 인해 크게 쓰러지기도 한다. 생도 합리적이지가 않다. 어제는 영화보다 비극적인 삶을 살아온 분을 만났는데, 오늘은 이렇게 순탄한 삶도 있나 싶은 분의 이야기를 듣는 곳이 정신과다.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건 일찌감치 알았다.



모 카페에서 이 글귀를 보고 꽂혀 바로 책을 구매했고, 책꽂이에 꽂힌지 반년이 지난 뒤에야 읽기 시작했다.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때로는 밤늦게 찾아오는 사람까지 다 치료해주었다. 나는 그에 대해 아주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내게 건네는 관심 어린 말을 들은 것도, 내가 무슨 소중한 존재라도 되는 양 진찰을 받은 것도 바로 그의 진료소에서였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혼자 그곳에 가곤 했는데, 어디가 아파서가 아니라 그저 대기실에 앉아 있고 싶어서였다. 나는 한참씩 대기실에 앉아 있곤 했다. 의자가 필요한 환자도 많은데 아무런 용무도 없는 내가 의자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화를 내기는 커녕 언제나 내게 다정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만약 내게도 아버지가 있을 수 있다면 카츠 선생님 같은 사람을 아버지로 택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에밀 아자르 - 자기앞의 생, p.35


아픈데가 없고 별 용무도 없는 꼬마가 병원 대기실에 한참씩 앉아있는 것은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다. 더욱이 의자가 필요한 '환자들'이 있는데, 아프지도 않고 두 다리 성한 아이가 떡하니 앉아 있다면 누군가는 당연히 말할 수 있다. 이 말들은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다.



"얘, 안아프면 저 쪽에 서있을 수 있을까?"

혹은,

"아픈데가 없으면 병원에 올 필요 없단다. 여긴 병균이나 우글우글하지. 그리고 너가 와 있으면 안 그래도 북적대는 병원이 더 복잡해져. 여긴 어린 애가 있을 곳이 아니니 가주겠니?"



그렇지만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비합리적인 행동이 결국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 카츠 선생님은 알았던 것 같다. 이 부모 없는 꼬마가 그저 대기실에 앉아있는 자체가, 의자에 환자를 앉히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이같은 사소한 경험들이 학대와 방치 속에 자란 아이를 살아남게 하고, 먼 훗날 트라우마의 치유제가 된다. 부모에게 버림 받고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더라도, 관심이 무언지, 사랑이 무엇인지 단 한 명에게서라도 느낄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은 살아남을 수 있다. 내 경험상,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나를 아껴주고 인정해준 사람을 1명은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살 수 있다. 세상은 비합리적이어서 불공평하지만, 비합리적이어서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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