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뽈)
다양한 경험이 켜켜이 쌓여 큰 그릇의 내가 생각하는 ‘꽤 괜찮은 어른’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난날의 삐래와 함께 했던 시간을 돌이켜보니 여전히 어른은커녕 못나도 한참 못났다. 과거의 찌질한 나의 모습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어 다시는 저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성장하는 것 같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행복을 느낄 수 있지만 평소라면 화가 나지 않는 상황에서도 불같이 화를 내고 무던히 넘길 일에도 초 예민이가 된다. 뜨거운 감정을 차가운 이성이 해결해 주길 바랐는데 여전히 내 머리도 뜨겁고 내 마음은 불덩이였다. 누가 찬물 좀 부어줬으면.
사는 것과 여행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서로에 대해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 안다며 으쓱했었는데 ‘넌 누구냐 낯설다.’ 이제 더 이상 부딪힐 일 없는 서로 배려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갈 길이 멀었다. 한라산 넘었더니 백두산. 새로운 환경에 처하면 또 다른 새로운 갈등이 등장하더라고. 그런데 그 갈등 덕분에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고 관계가 끈끈해졌다. 더 이상 가까워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사이에 틈이 있었나 보다. 그래도 뭐 그 큼 덕분에 30년 치 이야기할 에피소드가 적립되었으니 오히려 좋아.
삐래)
친구, 친구 언니, 친구 동생의 조합으로 장기 여행 간 사람 나야 나. 평생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남매들 간의 관계에 같이 엮여 얼마나 재밌고 잊지 못할 여행을 하게 되었는지. 사랑스러운 루나 언니, 개구쟁이 팔두. 팔자에도 없던 언니, 동생까지 얻게 되었다. 이런 여행은 이빼래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이렇게 다른 환경에서 자란 온 너와 내가 룸메이트 생활에서 장기여행까지. 엄청난 프로젝트를 무사히 잘 마쳤다. 우리에게 박수를. 수고했다.
모든 문제에 회피형 인간이었던 내가 이뽈과 함께 살고 여행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먼저 꺼내어 이야기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되었다.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이뽈 앞에서 만큼은 내가 먼저 상대의 마음을 추측하여 결론짓지 않고, 상대가 내 감정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을지 이리 재고 저리 재지 않았다. 이렇게 변한 나 자신이 좋았다. 이제 첫걸음을 떼었으니, 점점 좋아지겠지.
이렇게 시끌벅적한 여행을 몇 달 했는데, 혼자 유럽을 갈 생각 하니 벌써부터 외롭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