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해석이 여지가 있고, 여러 해석 중 베스트를 선택해서 전달해야 한다
통역사의 이해력을 결정짓는 핵심은 클라이언트의 발화 내용을 비롯한 여러 현장 내외의 Input 중에 무엇을 선택하고 배제할지 명확하게 통제하는 것이다.
통역사는 언어전문가가 아닌 이해전문가입니다. 언어의 장벽을 해결하려면 결국 다른 소통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솔루션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는 것 만큼 어려운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통역사라는 직업도 상당히 난해합니다. 그럼 통역사로서 이해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를 토대로 소통 전반에 대한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을까요? 현장에서 얻은 경험과 고민을 정리해서 야매통역사만의 야매 이론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통역사는 이해전문가라고 하지만, 사실 소통과 이해력이 중요하지 않은 분야는 없습니다. 그 중 특히 통역과 같이 이해력과 소통이 본질적인 중요성을 차지하는 분야들도 있습니다. 연애와 결혼, 기업의 주가관리와 마케팅, 교육 등이 있습니다. 일례로 저는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는데, 국가 간 분쟁의 핵심적인 요소로 상대방의 의도를 오판하게 되는 "miscommunication"과 "misinterpretation"이 꼽힙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어서 '소통'이라는 행위를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 행위는 헷갈림과 피곤함, 오해와 오판, 편견과 지협적 사고, 소음 등 너무나도 다양한 난관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통역사의 소통은 일반적인 소통에 추가로 여러 고려사항을 요합니다. 실시간으로 타인의 대화를 서비스하기 때문에 본인 페이스란게 없고, 메시지를 고민할 여유가 없습니다. 정확한 통역 외에도 적시적으로 리듬감 있게 통역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앞선 포스팅에서도 한번 언급했지만 클라이언트의 발언에 대한 여러 해석 중 찰나의 순간에 하나를 골라서 통역사로서 상대방에게 전달해야 하고, 그 잣대는 클라이언트의 의도를 찾아내는 깊은 이해에 기반합니다.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런 어려움을 현장에서 극복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통역사들이 경력 초반에 여러 실수를 하며 노하우를 쌓고, 그로 인해 굉장히 다양한 스타일의 통역사들이 생겨납니다. 조언을 구해봐도 결국 '알잘딱깔센'하게 해야 한다는게 주된 조언이었습니다. 저도 공군통역장교 교관을 할 때나 이후 후배들이 조언을 구할때도 제 개인적인 예시를 들 수 있었을 뿐, 알아서 잘 느끼고 대응하라는 말이 최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통역을 어떻게 잘하냐는 것은 통역사들이 케이스-바이-케이스로 공략해도 되지만 중심적인 논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노하우 전수 측면에서도 그렇고, 업계 자체의 표준화와 성장 측면에서도, 그리고 AI 솔루션 등 언어 장벽과 소통에 대한 혁신을 하는데도 중요할 것 같다는 가설을 가지고 저만의 야매 이론을 세워보았습니다.
먼저 '통역'을 구조적으로 접근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 명확한 논의를 위해 핵심 개념을 명확히 하고, 개념 간 다이나믹을 명시적으로 표현한다는 이야깁니다.
주로 이론을 세우려면 개념적 통일성을 위해 단위 (Unit of Analysis)를 임의로 정의합니다. 먼저 통역을 한다고 흔히 얘기하는 단위는 하나의 이벤트로 셉니다 (투자사 대표 티미팅, 아세안 국방장관회담 전체세션, 사령관 공조통화 등). 하나의 통역 이벤트에는 발화자가 표현하는 여러 메시지가 있고, 한번 혹은 여러번의 발화를 통해 이를 소통합니다. 메시지 한개에 대한 발화를 출발어에서 도착어로 변환하는 것을 통역 한 번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쪼개고 쪼개서 '통역 한 번'의 의미를 정의했는데요, 통역 아래와 같이 단순한 게임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통역이라는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클라이언트의 발화내용을 Input으로 받아 도착어로 Output을 내는 겁니다. 그 사이에는 실질적으로 언어 간 변환작업을 처리하는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참고로 무언가를 게임으로 표현한다는 의미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특정한 Win 기준에 부합하면 인센티브를 받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플레이어 (이 경우엔 통역사)가 조작하는 메커니즘이 있고, 함수마냥 주어진 Input에 대응하여 메커니즘을 통해 Win 기준에 부합하는 Output을 내려고 노력합니다. 통역 뿐만 아니라 컴퓨터게임, 전통놀이 등 다 똑같습니다.
통역이라는 게임의 Win 기준은 클라이언트의 메시지와 Output 간의 의미 차이입니다. 차이가 적을 수록 더 잘한 통역인 것이죠. 그리고 이 게임을 수십, 수백회 반복해서 하나의 통역 이벤트를 완수하게 됩니다. 평균 차이를 안정적으로 잘 관리하면 좋은 피드백을 받고, '잘 하는 통역사'로 자리매김합니다. 반대로 너무 커지면 중간에 통역사가 끌려나가거나 사후 컴플레인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해력을 어떻게 키울지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오면, 게임 구조 상 이해력의 범위는 Input과 Mechanism을 포괄합니다. 발화자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이를 소화해야 하니까요.
둘 중 주목을 받는 영역은 메커니즘입니다. 뛰어난 메커니즘을 갖춘 통역사는 아무리 어려운 Input이 들어와도, 주변 사람들이 ‘저걸 영어로 어떻게 해’ 하며 경악해도 도착어로 착착 만들어냅니다. 기계적으로 도착어를 출발어로 처리하는 개념이 아니라, 메시지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도착어로 표현하는 개념입니다. 그 와중에 발화자가 사용한 표현을 최대한 보전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Input 단계를 유심히 보면, 발화된 워딩 그 자체만을 Input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굉장히 다양한 Input이 존재합니다. 표정도 있고, 배경지식도 있고, 상식도 있고... 통역사가 Mechanism에 입력시킬 수 있는 Input은 많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Input을 통역하는 난이도도 분명 존재하지만, 많은 Input들을 고려하며 메시지를 적절히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부분입니다.
사실 통역 그 자체보다 클라이언트의 메시지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앞서 소통과 이해가 어려운 이유로 상대방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언급을 했었습니다. 발화자도 같은데, 발화란 발화자가 의도한 메시지에 대한 언어적 표현일 뿐 그게 메시지와 일치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송하게도 복잡하게 썼지만, 당연한 얘기입니다. 발화 내용만 가지고 소통을 할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팀장의 업무지시를 받은 팀원들은 회의실에 들어가 무슨 의미였는지 토론하게 됩니다. 연인들은 그때 너가 한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한참 이야기하죠. 우리는 사회생활을 통해 상대방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습니다.
통역사도 똑같습니다. 물론 발화자의 발언을 입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대로 도착어로 처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애초에 언어는 1:1 대응이 안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해하고 도착어로 표현해줘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렇다 보니 클라이언트의 손짓 발짓이나 목소리 톤, 감정선도 다 통역의 Input이 될 수 있습니다. 배경조사와 통역사의 상식도 통역의 Input이 됩니다.
그럼 모든 Input을 고려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Input을 포괄적으로 받을 수록 정보의 양이 많아져 과부하될 가능성이 커지고, 또한 다양한 Input이 있을수록 상충되는 내용이 생겨 통역사 본인 판단의 폭이 커집니다. 반대로 Input을 좁게 제한할 수록 발화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리스크가 커집니다.
정리하자면 통역사의 이해력을 키우는 관점에서 약간 막연하게 시작했지만, 사실 통역이 어려운 이유의 핵심은 너무나도 다양한 Input을 고려 및 통제하여 옳바른 이해를 하는 것이라고 범위를 좁혔습니다. 한 가지 오해를 방지하고자 미리 말씀드리자면 언어나 통역 메커니즘이 안중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통역의 핵심이 아니라 통역이 어려운 이유의 핵심을 이야기하는겁니다.
Input을 어떻게 골라야 할까요? 무슨 Input이 있는지도 잘 감이 안오는데, 어떤 선택을 할지를 현장에서 고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예시가 욕설을 통역해야 하는 경우인데, Input을 비속어 그 자체로만 받는다면 Output은 가장 유사한 비속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옳을까요? 그럴 수도 있죠. 근데 다른 Input을 고려해서 다르게 통역해야 하지 않을지 고민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통역사는 '어버버'하게 됩니다. 어버버 안하는 통역이 잘하는 통역이죠. 이후 포스팅에서 Input을 고르는 방법과 고민에 대해 더 깊게 보겠습니다.
실제로 Input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어떤 Input을 유효하게 생각하고 어떤 Input을 배제하는지는 통역사마다 스타일이 다양합니다.
이는 제가 짧게나마 세워본 이론에 비춰봐도 알 수 있습니다. Win 기준이 클라이언트의 메시지와 Output의 차이를 최소화하는 것인데, Input을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통역사가 기준점으로 삼는 해석이 바뀌기 때문에 기준이 바뀌는 것입니다. 저만의 이론에 신나서 복잡하게 얘기했지만, 통역사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해석이 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현장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이미 이해한 메시지를 가지고 말문이 막히는 것보다는 특정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가 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한 발화를 가지고도 여러가지 Output이 가능하니 고민이 되는 거지요. 일례로, 클라이언트가 손님을 맞아 환담으로 “다섯 분 다 모시기 힘든 분들인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오기로 한 손님은 다섯 명이 맞는데 실제로는 네명만 오고, 마지막 빈자리는 상대편 수행원이 앉아있던 것이죠. 그럼에도 다섯 명이 오기로 한 것 아니냐는 관점에서 일부러 다섯명이라고 한건지, 아니면 모르고 다섯명이라고 해서 통역사가 고쳐말하길 원하는지 순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당장 보이는 사실을 Input으로 고려할 것인지, 이를 배제하고 클라이언트의 발화에만 집중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죠. 결국에 고쳐서 말했는데, 여기야말로 정말 통역사 간 큰 차이가 존재하는 영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