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부터 네 머리까지 생각이 전달되는 모든 과정
소통의 전체 가치사슬에 걸쳐 발생하는 모든 Input은 잠재적 Input이며, 가치사슬 전반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어떤 Input을 고를지 고민을 시작할 수 있다.
통역사는 언어전문가가 아닌 이해전문가입니다. 언어의 장벽을 해결하려면 결국 다른 소통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설루션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통역사라는 직업도 상당히 난해합니다. 그럼 통역사로서 이해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토대로 소통 전반에 대한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을까요? 현장에서 얻은 경험과 고민을 정리해서 야매통역사만의 야매 이론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통역사는 매 순간 현장에서 '어디까지 통역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앞선 포스팅에서 이미 다뤘지만,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해석을 하는 게 아닌 것처럼 통역사의 입장에서 발화자의 한 마디를 놓고도 어떻게 통역할지, 어디까지 고려해서 해석해야 할지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상황이나 메시지별로 최선의 Input 조합을 선택하고 이를 기반으로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경험을 쌓을수록 더 높은 직책의 인사를 맡아 더 중요한 자리에서 통역을 하게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렇다면 실무적 조치보다는 전략적 방향성과 방침에 비중을 두고 이야기가 흘러갈 텐데, 한 마디 한 마디에 함의와 은유가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저도 그랬는데, 그럴수록 어디까지 고려한 통역을 할지, 내가 과연 그런 판단을 해도 되는 건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확실한 건 클라이언트가 말한 그대로를 직역하면 100점은커녕 혼나는 경우도 꽤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걸 곧이곧대로 통역하면 어떡하냐, 이렇게요.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통역사가 고려할 수 있는 모든 Input을 정의해 보자.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어떤 Input의 조합이 최선인지 고민할 수 있겠죠. 부끄럽지만 이런 막무가내의 방식이 야매통역사로서 좌충우돌했던 제 경험을 가장 잘 대변하는 듯합니다.
Input은 여러 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첫 번째로 가장 쉬운 방법을 사용해서 현장에서 수집하는 Input과 사전에 수집한 Input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수집하는 Input은 당연히 클라이언트의 발화 내용이 대표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발화 내용이 클라이언트의 핵심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한 정보 중 하나이지 100% 정확하지도, 유일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클라이언트의 바디랭귀지와 톤도 있고, 배석자들의 반응이나 첨언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PPT를 활용하는 등 부수적인 자료가 있다면 Input에 포함됩니다. 사전에 수집하는 Input은 배경조사와 인터뷰가 있습니다. 통역 이벤트가 확정되면 관련한 지식을 모으는 과정이죠. 또한 이와 무관하게 통역사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식과 관련 전문지식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Input을 나눠본 것은 Input을 수집하는 방식, 즉 How 관점에서 나눈 것입니다. How가 있으면 What도 있어야 하는데, 이건 당연히 클라이언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통역사는 발화자의 메시지를 청취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메시지 밖으로는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꽤나 확실한 바운더리인 셈이죠.
그럼 두 번째 방법으로 나눠보는 것은 메시지라는 개념을 나눠보는 겁니다. 메시지의 취지나 경중으로 나눌 수도 있지만,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메시지 하나가 성사되려면 여러 단계의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단계별로 나누는 것이 꽤나 유용했습니다. 메시지 하나가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일단 어떤 말을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고, 그다음엔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됩니다. 청취자가 이를 듣고 이해하는 작업도 필요하죠. 따라서 하나의 메시지를 가치사슬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치사슬이라는 개념이 생소하신 분은 빵에 빗대 생각하시면 됩니다. 재료가 준비되어야 하고, 제빵사의 가공을 거쳐 판매가 됩니다. 그리고 소비자가 먹죠. 아무것도 없던 Zero Value에서 각 단계마다 Value add가 이뤄지며 제품 혹은 서비스로서 소비가 되는 형태가 Value Chain입니다. 메시지도 콘텐츠에 대한 생각과 고민이 선행되고, 그 생각이 언어적 표현으로 제련되어 실질적으로 발화되는 작업을 거칩니다. 그럼 청취자 측에서 이어받아 이를 듣고, 머릿속에서 메시지에 대한 생각과 고민까지 하는 Value Chain의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통역사가 고려할 수 있는 모든 Input은 각 가치사슬에 대해 현장 혹은 사전에 수집할 수 있는 정보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중 사전 수집은 쉽습니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가치사슬을 가이드 삼아 조사한 내용을 정리하면 됩니다. 예컨대 사전 준비로 주로 클라이언트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공부하는데, 이는 Thinking 단계에 대한 준비에 해당합니다. 사실 Talking 단계에 대한 사전준비도 매우 중요합니다. 공식 어젠다가 아니더라도 둘 간의 관계는 어떤지, 전에 만난 적이 있는지 등을 고려하면 어떤 분위기와 톤으로 통역에 임할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가치사슬을 기반으로 ‘어디까지 통역할까’ 고민한다는 의미는 어느 가치사슬을 커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치환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다양한 Input을 단순히 리스트로 나열하면 굉장히 긴데, 다섯 개의 사슬로 묶어서 생각할 수 있어졌기 때문입니다. 각 사슬별로 발화자의 메시지에 대한 어떤 내용과 고민을 담고 있는지 살펴보며 특정 사슬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는 의미가 무엇인지 같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자연스럽게 여러 선택지 중 무엇이 통상적인지, 최선인지 등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Thinking: 상대방에게 전달할 메시지를 떠올리는 단계입니다. 통역사는 발화자의 이런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고자 Input을 수집합니다. 미리 준비된 메시지일 수도 있고,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사전 수집 차원에서는 통상적으로 어젠다와 토킹포인트를 이벤트 전에 제공받아 보고 직접적으로 파악합니다. 물론 토킹포인트 대로 발언하지 않는 클라이언트도 많긴 합니다. 토킹포인트를 대충 쓴 경우도 있죠. 통역사가 상황인지만 있다면 통역 이벤트의 사전조사를 통해 어떤 자리이고, 클라이언트는 왜 참석했고,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등을 통해 어떤 생각을 할지 사전에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통역이 상호 간의 대화라면 상대방의 발언을 토대로 어떤 대답이 나올지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Thinking 단계를 Input으로 고려한다는 것은 발화자의 의도를 해석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로 인해 의도에 비해 표현 방식이 상충된다면 통역사만의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죠. 그 고민은 통역사로서 이해한 메시지와 현장에서 발화된 버전과 다르다면 그 격차를 어떻게 해소할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통역사가 눈치껏 바꿀 수도 있고, 그럼에도 그대로 둘 수도 있고, 혹은 클라이언트에게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런 일련의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Thinking 단계를 Input으로서 고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이를 제외한다고 하면 표현에 집중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Verbalizing: Thinking에서 정해진 메시지를 언어적인 표현으로 제련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통역사는 발화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표현을 구성했는지’ Input을 수집하게 되며, 발화자가 선택하는 단어와 문장구조, 문장의 순서 등을 두고 고민합니다. 전문적인 분야일수록 정해진 어휘가 있으며, 이를 공부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또한 클라이언트의 대화 스타일도 하이프로필 인사라면 사전에 유튜브 등을 통해 손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통역뿐만 아니라 이 과정을 Interpret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이디어를 언어적으로 풀어내는 과정이니까요.
이 단계를 Input으로 고려하는 통역사는 두 가지 고민을 합니다. 첫 번째로 주어진 메시지에 대해 발화자의 Verbalization이 적절한가, 그리고 적절하지 않다면 개입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랜덤 한 예시를 들자면 막걸리의 발효과정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설명이 틀리거나 잘못된 어휘를 구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통역사로서 클라이언트의 버전을 최대한 살려줄 것인지, 아니면 보다 설명이 잘 될 수 있도록 내용과 워딩에 개입을 할 것인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언어의 특성상 발화자의 Verbalization이 도착어로 직접적인 변환이 불가한 상황도 왕왕 발생하는데, 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통상적으로 전자보다 통역사들이 더 자주 개입하는 상황인데, 발화자의 워딩 그대로를 전달했을 시 의미전달이 전혀 안될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클라이언트가 소개할 때 자주 접한 상황입니다. 이를 고려해 풀어 설명하는 클라이언트도 있지만, 고유명사 그대로 쓰는 분들이 다수입니다. “한복은 색깔이 화려한데, 그런 화려한 한복들은 주로 양반들 위주로 입었습니다”라고 했을 때, 통역사가 "Hanbok, Korea's traditional clothing,..."으로 부연하는 예시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Talking: 이 단계에서 통역사는 '발화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에 집중하게 됩니다. Talking 단계를 Input으로 받지 않는 통역사는 없습니다. 다만 앞선 두 단계를 Input에서 제외한다면 발화되는 표현과 단어에 집중하여 통역하게 됩니다.
한 가지, 많이 놓치는 현장의 변수인데 Talking은 무엇이 발화되느냐는 것도 있지만 실제로 Talking이 잘 이뤄지는지도 포함합니다. 말 그대로 발화자가 Verbalizing 한 메시지를 세상에 내놓는 단계니 까요. 마이크 사용이 익숙지 않다던가, 애초에 음향 시스템에 이슈가 있는 상황도 있습니다. 발화자가 발성이 안 좋은 경우도 있고, 환경이 너무 시끄러운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통역사가 개입을 할지 고민할 영역입니다. 최소한 Talking을 위해 어떤 환경인지, 혹은 클라이언트를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는지는 사전에 생각하고 들어갈 수 있겠습니다.
Input을 고르는 고민은 보다 세부적으로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겠지만, 큰 틀에서 가치사슬에 대한 첨언을 한 가지 더 하고자 합니다. 통역사의 위치에 대한 얘긴데, 메시지 가치사슬 상 Talking과 Listening 단계 사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통역사는 Talking 단계의 Input, 즉 발화자의 발언만을 가지고 그대로 청취자에게 전달한다는 오해하기도 합니다. 왜 사전에 통역사에게 자료를 공유해야 하는지 되물은 클라이언트도 많았습니다. 그냥 현장에서 듣고 하는 건데 왜 자료를 넘겨줘야 하느냐는 것이었는데요, 같은 오해로 인한 반응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 결국 통역사도 대화의 일원입니다. 다만, 그 누구보다도 알아듣고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자, 듣는 사람에게 이해를 시켜야 하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이상적으로는 모든 Input을 고려해서 완전한 이해를 가지고 메시지를 옮기는 것이 ‘클라이언트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역량입니다 (다만 컴퓨터가 아닌 이상 모든 Input을 항상 안정적으로 핸들링하긴 어렵죠). 실제로 현장에서 제한된 주의력으로 어디까지 통찰력을 발휘할지는 아예 다른 얘기입니다. 여하튼 본질적으로 통역은 단순한 언어적 변환이 아닌 실질적인 소통의 단계이며, 그 Input의 범주는 소통의 전 단계를 아우른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걸 본인만의 노하우로 풀어내는 통역은 확실히 ‘worth their weight in gold’ 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