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이 안 되는 내용을 통역해야 한다면 어떡해야 할까?
통역장교로 근무하던 시절, 한미 연합연습을 마칠 때마다 한·미 양측 사령관 주관으로 주요 지휘관들이 참석하는 만찬이 열리곤 했습니다. 모두가 힘든 연습을 마무리하고 축하하는 자리였지만, 통역장교들에게는 마지막으로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저는 양측 참모장 사이에 앉아 있었습니다. 건배사를 통역하며 참석자들이 막걸리를 시원하게 들이켜는 모습을 보며 침만 삼키고 있던 참이었죠. 미군들은 항상 막걸리에 관심이 많았고, 또 좋아했는데 오늘따라 부임하신 지 얼마 안 되신 분께서 막걸리가 다른 Rice Wine과 어떻게 다른지 물어봤습니다. 약간 싸한 감정을 느끼며 통역했는데, 참모장님의 답변은 싸하다 못해 추웠습니다.
“막걸리는 막 걸러서 막걸리라고 합니다. 찐하잖아요. 그냥 라이스 와인이 아니에요.”
“막 걸러서 막걸리”는 전형적인 언어유희입니다. 뜻은 전달할 수 있지만, 한국어 말소리에 기반한 유머를 살리는 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참모장님은 뒤돌아 저를 보며 덧붙이셨습니다.
“이거 통역이 얼마나 잘하나 봅시다.”
그 상황에서는 “얼마나 잘하나 보자”라는 농담이, 사실 저에게는 시간을 벌어주는 생명줄과도 같았습니다.
“Let’s see what the interpreter makes of this.”
통역은 기본적으로 선입선출, 그러니까 들어온 순서대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언어유희를 살리려니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나중에 나온 쉬운 멘트를 먼저 통역하며 시간을 번 겁니다. 체감상 2~3초 이상 딜레이가 생기면 부자연스럽기에 빠르게 해석을 시작했습니다.
“It’s 막걸리, and it’s two things, 막 and 걸리. 막 is roughly, and 걸리 is filtered. It’s roughly filtered rice wine, and that’s why it’s thick.”
살짝 길었지만, 나름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래, 나쁘지 않았어!” 하고 의기양양하게 참모장을 올려다봤는데, 참모장님께서는 딱히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허! 재미없긴. 통역이 농담을 다큐로 받았네요.”
솔직히 이런 지적을 들으면 조금 실망스러울 법도 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일단 통역을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통역했습니다.
“It was funny in Korean. Looks like the interpreter told you about the joke but couldn’t tell the joke.”
약간 의역이었지만, 만찬과 같이 술을 곁들인 현장에서 중요한 건 맥락과 분위기입니다. 건배사 못 알아들었다고 어버버 할 바엔 차라리 알아서 건배제의를 해버리는 게 나을 정도죠. 참모장님의 말씀에서 “다큐”를 “노잼”의 뉘앙스로 바로 이해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기도 했습니다.
딜리버리는 최대한 불쌍하게 들리도록 톤을 조절해 말했습니다. 통역사는 자신 있고 프로페셔널하게 말하는 게 기본인데, 일부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 건 웃음을 유도하려는 의도였죠. 왜냐하면, 통역 장교가 난감한 상황에서 혼나는 모습은 타인에게는 꽤 재미있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거기다 혼난 내용을 생중계로 통역하면서 불쌍한 톤을 덧붙이면 더 웃길 테니까요. 제 의도대로 미군들도, 한국 측도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분위기는 완전히 풀렸고, 저도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안전하게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참모장님께서 웃음을 멈추고 갑자기 제 어깨를 꽉 잡으셨습니다.
“야, 통역! 네가 술을 안 먹고는 어떻게 취한 우리를 알겠어. 마셔.”
이 말을 통역하며 동시에 조리병이 전달해 준 막걸리 잔을 받아 들고 몇 번 원샷을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지적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또 그랬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이 이야기는 저자가 Threads에서 시리즈로 올린 통역 에피소드를 갈무리한 버전입니다. 최신 업로드를 보시려면 Threads에서 야매통역사를 검색해주세요! Link: https://www.threads.net/@interps_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