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8
3.5/5
어른들을 위한 잔혹 동화에 동심을 버무리는 법. 또는 그 반대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에 대한 리뷰입니다. 스포 있습니다.
1880년대 소설 피노키오를 원작으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특유의 어두운 색감과 불쾌한 크리쳐, 스톱모션의 거친 동작이 버무려져 썩 유쾌하지 않은 분위기를 뽐내는 작품입니다. 덕분에 감독의 전작 '판의 미로'와 같이 어린이들보다는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의 느낌이 강합니다.
영화를 보면 두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둘 다 원작과의 차이점에 관련된 것인데요. 하나는 '왜 원작과 달리 시대를 1910년대의 이탈리아로 잡았을까?'이고요. 다른 하나는 '왜 원작과 달리 피노키오가 진짜 사람이 되지 않을까?'입니다. 또, 곰곰이 이 두 가지 궁금증에 대한 답을 생각하다 보면 결국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제페토와 피노키오의 관계에서 피노키오가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목각인형이지만 자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피노키오를 제페토는 미워할 수가 없었죠. 오히려 그 둘 사이에 걸림돌이 되는 건 친아들 카를로와는 다른 천둥벌거숭이 같은 피노키오의 성격이었죠.
피노키오의 재질에 관심을 가진건, 오히려 볼페 백작과 포데스타 시장이었습니다. 떠돌이 서커스 단장인 볼페 백작은 말하는 목각인형인 피노키오를 돈벌이 방법으로, 파시즘에 경도된 포데스타 시장은 불로불사의 정예 군인으로 생각합니다. 피노키오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게 아니라 각각 자본주의 노동력 착취를 통한 돈벌이 수단으로, 파시즘 전체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죠.
이 둘에게 이용당하면서도 피노키오는 한 가지 목표를 잃지 않습니다. 바로 좋은 아들이 되어 제페토와 재회하는 것. 자신의 처지가 어른들의 사정에 의한 것이란 것도 모른 체, 피노키오는 제페토와 만나겠다는 순수한 열의와 동심으로 묵묵히 시키는 일을 할 따름입니다.
이 부분은 감독의 전작 '판의 미로'를 연상시킵니다. 판의 미로에서 감독은 어린이와 어른의 공간을 분리시키고 어른들의 이야기를 관객에게만 노출시켰습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어린 주인공이 동심을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어른들의 일에 휩쓸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조마조마 긴장하며 영화를 관람하게 되죠. 두 영화의 차이점이라면 판의 미로에서는 주인공이 스페인 내전이라는 어른들의 사정에 직접 말려들지는 않고 주변에서 여파를 맞지만, 피노키오는 사건의 중심에 직접 들어가지만 그의 천진난만한 성격으로 어른들의 민낯을 의식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른이 시키라는 대로만 하는 아이와 같죠.
원작과 다른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이 작품에서 피노키오는 여러 번 죽게 되는데, 죽을 때마다 사후세계로 가서 스핑크스 형상을 한 죽음의 요정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의 요정은 피노키오가 불로불사의 몸으로 몇 번을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특혜를 받았다 하죠. 하지만 결말부에 피노키오는 불사의 특혜를 포기하면서 제페토를 살리고 대신 죽습니다. 그리고 그런 피노키오를 귀뚜라미 세바스티안 크리켓이 푸른 요정에게 소원을 빌어 살리게 되죠. 목각인형의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피노키오를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을까요? 사실 어느 정도 정답이 나와있습니다. 네. 피노키오는 영화에서 이미 가장 '인간스러운' 존재입니다. 노동 착취와 전체주의 같은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는 세상에서 진실되고, 감정에 충실하고, 관계를 중요시합니다. 인간을 전체의 부분,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대하죠. 제페토를 구하기 위해 불로불사라는 특혜는 거리낌 없이 버릴 줄도 압니다. 피노키오가 인간이 될 수 없는 결격사유는 그가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유일해 보입니다.
감독은 어쩌면 몸의 재질이 전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고상한 것이라고요. 상대를 수단으로 보지 않고 개체로 대하는 것. 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이 가장 인간스러운 것이라고요. 푸른 요정이 사람으로 바꾸어주지 않아도 피노키오는 이미 사람이었습니다.
영화는 시간이 흘러 피노키오의 주변 인물들이 모두 죽고 나서, 피노키오가 과연 다른 인간처럼 죽게 될지 보여주지 않으면서 끝이 납니다. 관객의 상상에 맡기죠. 감독은 마치 피노키오가 평생을 살게 될지 아니면 인간처럼 죽을지는 정말 하찮은 문제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혹시? 하는 마음에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깔끔한 결말에 찜찜한 장난을 쳐 놓은 듯합니다.
우중충한 분위기의 어른들을 위한 피노키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색다른 재해석에 마냥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울림이 있는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