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연
만약 CJ가 영화 제작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면 딱 이렇게 나왔을 것이다.
이 책이 이뤄낸 다양한 성과들에 혹해 사읽기 시작했다. 책 읽는 속도가 굉장히 느린 나조차도 이틀이면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였고 내용도 무겁지 않다. 분량도 266페이지로 짧아서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단점 역시 가볍다는 것이다. 인물들은 평면적이고 특색 없다. 어디서 본 듯한 캐릭터들이 어디서 들은 듯한 대사를 치고 어디서 나온 듯한 상황이 연출된다. '소통의 중요성'이라는 책의 주제를 위해 한 번씩 등장해 치고 빠지며 상황을 위한 도구로 소모된다.
이 책은 노숙자였던 주인공 독고가 일하게 된 편의점에 여러 사연이 있는 사람이 찾아오고, 그 사람들이 독고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치유받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 사연들은 단기간에 비롯된 것부터 십수 년에 걸친 것까지 각기 다르지만 대부분 소통의 부재가 원인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원인을 알면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은가! 따란! 독고와 대화를 하면 '그래 소통을 하자!'라는 인사이트가 생기고 사연의 무게가 무색하게 간단하게 해결돼 버린다. 독고를 노숙자라고 무시했던 지난날을 반성한다. 미안하고 고맙다 독고야! 끝. 도대체 소통이 이렇게 쉽다는 걸 왜 몰랐을까? 다들 바보임이 틀림없다.
소설 종반부에 나오지만 사실 독고는 과거 강남 성형외과 의사였다. 소설 중간중간에서도 기억을 잃어버린 독고가 머리가 꽤 좋다는 것을 보여주며 사실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근데, 그게 독고가 말을 더듬고 조악한 조어력을 갖고 있어도 남들에게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의 근거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 역시 과거 가족 간의 소통 문제로 뼈아픈 상처를 입은 적이 있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도 아니다. 인사이트를 주기보단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오히려 평범보다 살짝 더 나쁜 축에 속하는 인간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이상하게 신뢰가 가고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고 이상하게 통찰력 있는 말을 한다. 참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소통은 중요하다. 모두 아는 사실이다. 이걸 모두가 아는 이유는, 그만큼 소통이 안되기 때문이다. 단순한 언어 구사력의 문제가 아니다. 소통이란 말이 오고 가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이 오고 가고 맥락이 오고 가고 그들의 인생이 오고 가는 것이다.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렵지 않았다면 우린 소통의 소중함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이 책은 따뜻한 마음으로 소통해요~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있지만(또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소통이기도 하다. 특히 가족 간에는 더욱 그렇다. 마음으로는 미안하고 죄송스럽지만 입으로는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오는 게 가족이다. 지나온 세월만큼 관성이 붙어서, 바뀌고 싶어도 어느 순간 바뀌기가 죽기보다도 어려워져 있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로 덜컥 바뀔 상황이었으면 수백 번은 더 바뀌었을 것이다. 그래서 참 아쉽다. 이 책이. 그럴 의도는 결코 아니었겠지만, 신중하지 못한 주제의식의 표현으로 마치 소통의 고통이 폄하되는 것 같아서. 동전의 양면처럼 앞면을 보여주다가 형성된 자연스러운 뒷면이지만, 나에겐 그 뒷면이 더 부각되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