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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쁜 토끼 Dec 22. 2022

데미안

헤르만 헤세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이다.

소설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스스로를 찾아가는 여정과 고뇌를 담고 있으며 소설의 제목인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여정을 돕는 친구이자 선지자이다. 싱클레어의 자아 찾기 과정은 해체이며 구축이다. 내 자신을 찾고 싶다면 우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알의 껍질이 어떤 것인가부터 알아야 한다. 싱클레어를 둘러싸고 있던 껍질은 무엇이었을까.


1. 카인이 악인인 이유는 사람들이 카인 보고 악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싱클레어는 어려서부터 동시에 두 가지 세계를 보았다.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밝은 세계는 아버지 어머니와 가족이 속한 세계로 빛나고 정돈되고 안전하다. 선이 속한 세계이다. 반면 어두운 세계는 뒷골목의 불량배와 하녀의 뒷담화가 속한 세계로 어둡고 음침하고 위험하다. 통상적인 악이 속하는 세계이다. 밝은 세계에 속해 있던 싱클레어를 멱살 잡고 어두운 세계로 끌고 가는 건 싱클레어가 한 사소한 거짓말이었다. 이 거짓말은 아버지의 권위와 가정의 안정성에 실금을 만들었고 이 실금은 싱클레어가 속해있던 밝은 세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부수기에 충분했다.


데미안이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통해 싱클레어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마 이럴 것이다.

"네 머릿속에 있는 선과 악을 결정짓는 기준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의심을 품어본 적 있니?"라고.


이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싱클레어가 가장 먼저 맞닥트리게 된 껍질이다. 당위적으로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학습되어 온 것들. '밥 먹고 양치질 하기', '자고 나서 이불 정리하기'와 같은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부모님께 문안 인사하기'와 같은 예절, '약한 사람을 돕기'와 같은 도덕을 지나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회 규범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응당 배우게 되는 사회적 인간화에 대한 작업들 말이다. 왜 싱클레어는 그것들을 밝은 세계로, 선한 것으로 봤을까? 반대급부에 있는 것들은 왜 악하고 거부감이 들까? 이 선과 악에 대한 강요된 기준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알에서 나오기 위한 싱클레어의 몸부림인 것이다.


2. 청소년기에 겪게 되는 해체의 순간들


우리의 인생 전체가 당위에 대한 해체와 재구축의 연속이지만, 이 과정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순간은 아무래도 청소년기일 것이다. 청소년기는 부모의 손을 떠나 사회화 과정을 공교육이 맡게 되면서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사회적인 동물로 성장하는 시기이다. 이와 동시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당위의 해체를 겪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이는 가정으로부터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이라 배웠던 게 다양한 가정환경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조금씩 격차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러한 격차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껍질에 잔금을 긋기에 충분하다. 집에서 항상 식전 인사를 하라고 배운 아이가 식전 인사를 하지 않는 친구를 옆에서 보는 것 같은 사소한 상황조차도 의미가 있다. 당위의 부정은 불안함과 동시에 배덕감을 가져온다. 친구들과 있을 때면 나를 옥죄어 오는 의무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거기서 오는 배덕감과 동질감은 아이를 가정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친구와 보다 더 가까운 존재로 만든다. 싱클레어가 친구들을 따라 술집에 드나드는 것도 술이 좋아서 술집에 가는 것이 아니다. 친구 무리와 악행(어렸을 적부터 주입된 기준으로 봤을 때)을 저지른다는 배덕감에 잠시 사로잡힌 것이다.


이성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마냥 친구였던 존재가 2차 성징을 겪으며 조금씩 이성이라는 존재감을 뿜어올 때,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을 남과 여로 구분 짓는 성이라는 기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양성을 분별하는 생물학적 구분선이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가졌음을 체감하는 것이다. 결국 이성에 대한 특징을 파악하며 동시에 자신의 성의 특성 또한 돌아보는 시기가 된다. 싱클레어에게 베아트리스는 해체의 순간에 마주친 재구축의 연료였다. 그는 베아트리스를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성이 그의 자아의 한 부분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3. 자신을 찾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과 조언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자신을 찾는 방법은 어쩌면 한 가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헤르만 헤세는 '오직 끊임없는 자아 탐색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피스토리우스는 선현들의 방법에 매달린다. 옛사람들의 방법을 탐구하고 답습하려 한다. 직접 부딪쳐보기 전에 마치 공략법부터 달달달 외우는 것 같다. 어쩌면 나에게 가는 길이 너무 어려워 포기한 자신을 마주할 수 없어 더 편법에 빠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적게 먹고 많이 운동하는 것이 살을 빼는 방법인 걸 누구나 다 알지만, 좀 더 편한 길로 가고 싶어 다이어트 식품에 눈을 돌리는 것과 같다. 크나우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도 껍질을 깨고 싶어 하지만 그는 껍질의 실체를 매우 흐릿하고 얇게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마치 수도승처럼 자신을 단련하려 하며 '자아'라는 실체를 영적인 것으로 보고 도달하기 위해 영적인 방법에 집착한다.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시간낭비 말고 그냥 가만히 생각이나 해.' 어쩌면 싱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에게 한 구닥다리나 찾고 다닌다는 말이 피스토리우스에게는 이렇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엉뚱한 방향에 집착하게 될까. 생각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실천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옆 길로 눈을 돌린다. 어쩌면 이 길로 가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어쩌면 정도가 너무나도 험해서 이 길로는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경지에 나도 모르게 방어 기제가 발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왕도는 없다. 데미안이 툭툭 던져주는 화두를 싱클레어는 묵묵히 생각할 뿐이고 결국 카인이 된다.


'죄는 권위에 대한 불복종이다.' 만약 그 불복종이 새로운 세상을 가져온다면 그는 영웅이라 불리고 그렇지 못한다면 그는 '성경의 카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평화로운 세상에는 영웅이 태어날 수 없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태어난 영웅을 우리는 카인으로 낙인찍고 사회 부적응자라 부른다.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난세에 태어나야지만 영웅으로 불리는 것이다.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하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고독이 찰거머리처럼 붙어있는 길인 것이다.


현실에는 애석하게도 데미안이 없다. 우리 모두는 카인이 되지 못한 아벨이면서 카인이 되려 하는 아벨이다. 그래서 열심히 '나만의 데미안'을 찾아야 한다. 어떤 이가 나의 데미안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책이 될 수도 있다. 또 나를 깊은 절망에 빠뜨리는 사건이 나만의 데미안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데미안이 나에게 던지는 화두를 깊은 바닷속에 침잠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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