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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휴 Dec 04. 2023

에세이의 정수를 따라가는 발걸음

_ 리베카 솔닛 에세이『멀고도 가까운』(반비, 2016) 김현우 옮김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이다. “예술 평론과 문화비평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로 주목받는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1980년대부터 환경 · 반핵 · 인권운동에 열렬히 동참한 활동가”로 소개된다. 방대한 내용을 축약하기 어려워 옮긴이의 말을 그대로 옮겨 본다.    




“평생 딸을 못마땅해하고, 시기하고, 불평하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후, 어머니의 집에 있던 살구나무의 살구를 모두 따서 자신의 집 안에 들여놓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가는 숙제처럼 떨어진 살구 앞에서 어머니의 삶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들을 수 없다면 스스로 찾아보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다른 많은 이야기들을 거친다. 눈의 여왕이 등장하고 프랑켄슈타인이 등장하고, 체 게바라의 혁명이 등장하고, 아이슬란드의 늑대 이야기가 등장하고, 남편과 아이의 사체를 뜯어먹을 수밖에 없었던 에스키모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이야기들을 거치며 작가는 어머니와 화해한다. 그건 어머니와의 화해이면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는 자신과의 화해이기도 했다.”   




차례는 살구, 거울, 얼음, 비행, 숨, 감다, 매듭, 풀다, 숨, 비행, 얼음, 거울, 살구.

살구에서 시작해 다시 살구로 돌아온다. 집에서 아이슬란드까지 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오는 삶의 여정과 닮았다. 제목인 “멀고도 가까운”도 마치 어머니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가까이 있다는 뜻으로 생각되었다. 그 말은 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뉴욕에서 몇 년을 지낸 후 뉴멕시코의 시골로 이사했을 때,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라고 적었다고 소개하면서 그건 물리적인 거리와 정신적인 거리를 함께 가늠하는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글쓰기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명문장과 함께 가끔, 반드시, 듣게 되는 리베카 솔닛. 그의 에세이집을 설레는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와 맏딸인 리베카 솔닛. 살아오면서 사랑받지 못했고, 단호한 훈육만 기억나는 관계. 아들이 우선이었고, 권위적인 부모님. 딸의 성별과 외모까지 질투의 대상으로 삼았던 어머니였다.  병이 심해졌을 때, “그 나약함의 날 것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에” 어머니와 가까워진 것 같다고 고백한다. 거의 모든 장에서 잠언처럼 외워두면 좋을 문장들이 등장하고 있어 할 수만 있다면 책을 통째로 외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1장 「살구」에서 “나는 어머니가 뜯어지는 책 같다고 생각했다. 책장이 날아가고, 문단이 뭉개지고, 단어가 흘러내려 흩어지고, 종이는 순수한 흰색으로 되돌아간다. 가까운 기억이 먼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은 더해지지는 않는, 뒤에서부터 지워지는 책. 어머니의 말에서 단어가 사라지기 시작하며, 텅 빈자리만 남았다.”라고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책에 비유해 표현하고 있다. 알츠하이머는 물론,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안타까워하는지를 알 수 있는 문장이었다.   




2장 「거울」에서 “나의 어머니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시기에 그 모든 일을 했음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나를 먹여 주었고, 씻겨 주었고, 입혀 주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말하는 법을 배우고, 그 밖에 수천 가지 도움을 받았다. 매시간, 매일, 매년 그런 일이 반복됐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내게 주었던 것이다. 내가 어머니를 돌본 이유는 그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시간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적었고, 끝까지 병든 어머니를 존중하고 보호했으며 의무를 다하고 끝내는 화해를 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또한, 내가 느끼는 부모님에 대한 서운한 감정들을 감사의 마음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3장 「얼음」에서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소개하면서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내적 평안과 가정에 대한 애정을 방해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며, 비슷한 주장이 책의 다른 곳에서도 자주 발견된다.”라고 했다. 가정의 소중함을 밝히고 있는 이 문장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너무나 공감이 많이 갔다.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셜리는 이 소설을 열여덟 살에서 스무 살에 완결했다고 한다. 부모들이 작가였으며 불행했던(이혼, 유산 등) 결혼 생활과 자신의 불행한 삶(자신을 낳다가 어머니 사망, 자신의 아이들 사망 등)이 바탕이 소설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도 가련하면서도 이해가 되었다.  




4장 「비행」에서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라고 적었다. 이 문장은 글쓰기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잠언처럼 따라다니는 문장이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이야기글 글이라는 형식을 통해 모두에게 알리는 행위이다.      




6장 「감다」에서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당신 스스로에게 해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라고 적었다. 6장에서는 체 게바라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의사였던 그가 동료와 함께 오토바이 여행을 하면서 오지의 나병 환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하고 치료하는 과정의 감정이입에 대한 설명이다. 또한, 고통에 대한 사유들도 많이 등장한다. 오토바이 여행을 통해 특별한 종류의 고통에 눈을 뜨게 되었고 확고한 목표 의식이 생겨서 혁명가가 되었다는 체 게바라, 나는 젊은 시절에 그의 평전을 읽으며 혁명에 대해 생각했고 그에 매료되었었다.   




7장 「매듭」에서 “이야기꾼은 또한 실을 잣는 이, 혹은 천을 만드는 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굽이굽이 흐르며 우리들 각각을 서로에게 이어 주고, 목적과 의미, 우리가 반드시 가야만 하는 어떤 길처럼 보이는 그곳으로 이어 준다.” 글을 쓰는 사람이거나 글쓰기를 배우는 이들에게 이정표 같은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이어 주고, 가야만 하는 길로 이어 준다는 말이 그런 생각을 끌어 왔다. 7장은 그가 암수술받는 이야기와 암으로 죽어가는 지인의 이야기도 적혀 있어 아프게 읽었던 장이었다. “크게 아프거나 다치고 나면 어떤 단절이 생기고, 덕분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고, 다시 시작하고 다시 살피는 계기가 된다. 그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적이며 그것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건이다.”라고 수술 후의 소회와 사유를 적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몸이 아픈 상태에는 왠지 모를 평온함도 있어서, 무언가를 해보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라고 적고 있다. 일 중독이라는 핀잔을 늘 듣는 내게도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좋을 시간이란 매혹적이었다.




8장 「풀다」에서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것들과 만나는 일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것과 떨어져 있는 일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이 모두 괴로움이다.”라고 인용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자신의 괴로움을 다스리기 위해 불교에 입문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불교의 가르침은 고통의 외적 원인을 근절하기보다 타인을 돌보고 만물에 공감할 것을 강조한다.”라고 정리해주고 있다.   




10장 「비행」에서는 새들이 땅에 거의 내려오지 않고 하늘에서만 사는 새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검은등제비갈매기 역시, 땅에 한 번도 내려오지 않은 채 적도 부근의 바다 위를 몇 년 동안이나 날아다니기도 한다고 해서 너무나 놀랍고 신기했다. 대부분 밝은 부분에서만 살아간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아이슬란드에서 생활할 때, 국립미술관의 전시실에 설치된 예술가 엘린의 작품 ‘진로(Path)’는 관람객이 체험할 수 있는 미로였는데 리베카 솔닛은 일곱 차례나 찾아가 어둠의 미로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아이슬란드는 6월 중순쯤에 하루 세 시간만 밤이라서 어둠이 그리웠다고 한다. 미로 안은 어두웠으며 희미하고 낮은 베이스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계속 울려서 편안함을 준다고 한다.


“창조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을 때만 일어난다. 창조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빛 속에만 머물지 않음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빛이 비치면 생각의 구체적인 생김새나 그림자가 드러나고 다른 이들도 알아보겠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곳은 그 빛 속이 아니다.”

“그것은 분리된 시간, 상징적인 시간이었고, 미지의 것, 알아낼 길 없는 것의 한가운데로 가는 여정이었다. 의미심장한 여정이자 위험과 의심, 어둠에 나를 던져 넣는 여정이었다.” 


그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독립된 주체로서의 자신이고자 했으며, 어떤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 진면목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생각되었다. 시위 현장에 과감히 뛰어들어 변화를 촉구하는 연대를 강조하고 실천하는 활동가의 모습과 겹쳐졌다.      

리베카 솔닛은 책이나 역사, 지식이나 확장된 사유를 말할 때는 단호하고 분명한 어조였다가 자기의 일상으로 돌아올 때는 시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나는, 한 문장, 한 단어의 뜻이라도 놓칠 수 없어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집중하여 읽어야 했다. 하지만, 그 집중의 시간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불 소행찬」 속의 부처님 이야기, 수없이 많이 등장하는 책과 작가와 작품 이야기, 동화, 영화, 북극곰, 극지방, 아이슬란드 이야기 등을 통해 펼쳐지고 펼쳐지는 사유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 작가 자신의 암 수술,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책을 손에서 놓아야 하는 순간들이 싫었다.     




책 한 권을 통해 여러 편의 책을 알게 되었고 이미 읽은 책을 되새김하기도 했다. 중요하고 기억해야 할 내용들이 너무 많아 인용 부분이 많았다. 꼭 다시 읽기를 해야 할 책이다. 열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 380쪽의 책을 다 읽었지만, 책이 끝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나는 책을 덮자마자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은 유혹을 견뎌야 했다. 또 다른 책들이 줄지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2022년 10월 12일  "YES24 주간 우수리뷰"에 선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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