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한 편 (9).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까치설날
이정록
까치설날 아침입니다. 전화기 너머 당신의 젖은 눈빛과
당신의 떨리는 손을 만나러 갑니다. 일곱시간 만에 도착한
고향. 마깥마당에 차를 대자마자 화가 치미네요. 하느님, 이
모자란 놈을 다스려주십시오. 제가 선물한 점퍼로 마당가
수도 펌프를 감싼 아버지에게 인사보다 먼저 핀잔이 튀어
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내가 사준 내복을 새끼 낳은 어
미 개에게 깔아준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개만도 못해요? 악
다구니 쓰지 않게 해주십시오. 파리 목숨이 뭐 중요하다고
손주 밥그릇 씻는 수세미로 파리채 피딱지를 닦아요? 눈 치
켜뜨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버지가 목욕탕에서 옷 벗다 쓰
러졌잖아요. 어머니, 꼭 목욕탕에서 벗어야겠어요? 구시렁
거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마트에 지천이에요. 먼젓번 추석
에 가져간 것도 남았어요. 입방정 떨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
루 더 있다 갈게요. 아니 사나흘 더 자고 갈게요. 거짓부렁하
게 해 주십시오. 뭔 일 있냐? 고향에 그만 오려고 그러냐? 한
숨 내쉴 때, 파리채며 쥐덫을 또 수세미로 닦을까봐 그래요.
너스레 떨게 해주십시오. 용돈 드린 거 다 파먹고 가야지요.
수도꼭지처럼 콧소리도 내고, 새끼 강아지처럼 칭얼대게 해
주십시오. 곧 이사해서 모실게요. 낯짝 두꺼운 거짓 약속을
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당신의 나무만이 아님을 가르쳐주었
듯, 내 나무그늘을 불평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대대
로 건네받으셨다는 금반지는 다음 추석에, 그다음, 그다음,
몇십년 뒤 설날에 받겠습니다. 당신의 고집 센 나무로 살겠
습니다. 나뭇잎 한 장만이라도 당신 쪽으로 나부끼게 해주십
시오.
* 마음을 붙잡은 문장
당신의 젖은 눈빛과 당신의 떨리는 손을 만나러 갑니다.
(우리 모두는 내막을 다 알고 있다. 늙은 부모가 우리의 마음과 맞지 않게 행하는 것들의 속내를 다 알면서도 왜 저러시나? 조금 더 편한 길을 두고, 그런 마음에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직접 화를 낼 수는 없어서 에먼 하느님께 매달린다. 이젠, 우리가 든든한 나무가 되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