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하면 누가 시켜서 하는 것 같은 강제성이 느껴지지만 물론 누가 내게 “이 책을 꼭 읽어라”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이 나를 재촉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한 달 넘어 지내다 막 돌아온 나로서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병약한 몸으로 아내를 따라 미국 이곳저곳을 반강제적으로 끌려다녔던 남편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피로가 누적되었던지 감기몸살로 드러누워버렸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직장을 옮겨 온 아들은 새집을 구해 나간다고 여러모로 분주하다. 나도 감기 기운으로 기침이 자꾸 나고 눈이 침침하건만 책에 빠져 다른 일을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왜 갑자기 독서삼매경에 빠져버렸는지 나도 나를 모르겠다. 마치 내일 시험이 있는데 오늘 서랍 정리를 하고 싶어 하는 고3 수험생처럼 내가 지금 그렇다. 나는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건성으로 남편과 아들을 쳐다본다.
이유를 따져보자면 여행지에서 돌아다니기에 바빠 조용히 책을 읽지 못하였는데 그런 아쉬움이 폭발했는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좋은 책들이 한꺼번에 손에 들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딘가에 몰두하면 다른 일은 다 잊어버리는 나의 성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지금 나는 읽어야 할 책들을 앞에 두고 마음이 바쁘다.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유혹하는 다섯 권의 책 제목은 이렇다.
일본인 関裕ニ가 쓴関<縄文文明と中國文明>, わ岩井圭也의 <われは熊楠>, 김이오 작가의 <고국(古國) 3>, 패트릭 브랑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와 모간 하우설의 <돈의 심리학>이다.
앞의 두 권은 뉴욕의 키노쿠니아 서점에서 산 책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縄文文明と中國文明>을 읽었다.
중국 문명과 일본의 즐문 문명을 비교하면서 일본 문명이 결코 중국 문명의 아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작가의 주장이 흥미로웠다. 일본 신궁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이 즐문문화인의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작가의 주장이 일본인 특유의 곡학아세(曲學阿世)인 듯 여겨지다가 게놈분석 자료를 이용해 일본인의 DNA는 동아시아인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나, 동아시아인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M7a와 N9b가 존재한다는 결과를 이용해 일본에 도래한 사람들의 이주 연혁을 4만 년 전으로 앞당기고 있고 이때 일본에 도래한 구석기인들이 만든 즐문문화가 오늘날 일본 특유의 문화 형성에 관여하고 있다는 주장이 흥미롭다. 거기까지 읽었다. 그것이 중국문명과 어떻게 다르다고 설명할지 자못 궁금한 지경이다.
집에 돌아오자 김이오의 <고국(古國) 3>가 궁금하여 이것부터 손에 잡았다.
<고국(古國)>은 김이오 작가가 잃어버린 한민족의 상고사를 추적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9권의 대역사극을 서술한 책이다. 흔히 중국의 역사를 한족(漢族)과 북방 민족의 투쟁사라고 한다. 북방 민족이라고 하면 중국을 그토록 괴롭혔고, 유럽을 아비규환으로 몰아넣었던 훈족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북방 민족이 갈라져 유라시아로 진출한 훈족이 되고 북경의 동북쪽을 호령하던 동이족이 만주 일대와 한반도, 일본열도로 남하하여 오늘날 우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지금껏 우리의 상고사를 밝혀줄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와중에도 작가가 중국과 일본의 고대사를 들춰내 우리의 역사를 회복하는 실력이 놀랍다. 나는 역사적 진실보다는 거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에 매료되고 말았다. 3권은 고구려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소국으로 나눠진 부여땅을 평정하여 고(古) 조선의 옛 강토를 회복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다. 우리의 게놈도 분석하여 동아시아인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결과들이 나올 것 같다(이미 발표되어 있겠지만).
뉴욕에 있을 때 메트로 폴리탄미술관의 방대한 수집품에 넋을 잃었던 터라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라는 책에 들어있을 내용이 궁금하여 얼른 읽고 싶어 안달이 난다.
책을 처음 펼치자 주인공이 어떻게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이 되었는지가 묘사되어 있다. 앞으로 그가 설명할 메트로 걸작들에 관한 이야기가 몹시 궁금하여 그 책도 빨리 읽고 싶다.
Morgan Housel의 <The Psychology of Money>는 브런치의 <화가 경영학자> 정창영교수가 추천한 책이다. 앞 서문을 펼쳐보았더니 돈을 모아 부자가 된 사람과 돈을 많이 벌었으나 파산한 사람의 예가 적나라하게 비교되어 있어 나의 흥미를 바짝 끈다. 약간 읽어본 글에서도 작가의 재기가 느껴진다. 문체가 간결하고 흥미를 끌만하게 서술하고 있어 마음에 속속 들어오는 것도 좋다. 얼른 읽고 싶다.
岩井圭也의 <われは熊楠>란 책은 목차를 보고 선택한 책이다. 熊楠(쿠마구수)라는 천재이자, 기인이었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인듯하다. 카테고리화할 수 없는 <智의 거인>이라는 문구에 매료되어 구입한 책이다. 그가 어떤 기묘한 인생을 살았는지 궁금하다.
책들을 앞에 두고 내 마음이 두근두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