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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친구들과 놀아요.

요가를 배우며

by 보현


요가를 마치고 요가 친구 몇 명과 별다방에 앉아 수다를 떠는 것이 일상의 즐거움이 되었다. 퇴직하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나의 모습이다.


나는 40년 간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냈다. 그동안의 나의 삶은 매우 단순한 편이었다. 눈 뜨면 학교로 출근하고 강의하고 실험하고 논문 쓰고 늦게 퇴근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동료 교수들과의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늘 시간이 아깝다는 강박관념에 쫓겨 수다를 떨며 노는 것에 대해 원천적으로 불안을 갖고 있었다.

정년 퇴임을 맞게되면 누구나 퇴직 후의 삶에 대해 꿈을 꾸게 마련이다. 나는 내가 늘 쫓기며 살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퇴직 후에는 여유롭게 살고싶었다.

여유로운 삶이라고 하면 대개 물질적으로 걱정이 없거나 시간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쓰고, 스트레스 없이 살아가며, 걱정없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다. 나라고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할 이유도 없을 듯하였다.


그러나 인생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나의 퇴직 1년 전에 남편이 덜컥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마치 신이 나의 계획을 비웃으며 “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아. 내일 내가 너의 목숨을 가져갈지도 모르는데 너는 곳간을 새로 짓고 거기에 곡식을 가득 채우려고 하느냐”하며 나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정신없이 환자의 병간호에 매달렸다.어떻게든 남편을 살리고 싶었다. 그리고 어떻게 시간이 흐른지도 모르게 5년이 지났다. 가슴조리며 기다리던 의사의 완치판정을 받았다.


한 숨 돌린 나는 그제야 나를 둘러보았다. 몸과 마음이 피폐된다는 것이 이럴 때를 말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에 주름은 더욱 깊어졌고 의욕상실에 빠진듯한 내 몸은 피곤에 젖어 보였다.


나는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근처 주민센터에서 하는 요가교실에 등록하는 것이었다. 주민센터를 선택한 것은 이제 나도 직장인이 아니라 주민의 일부가 되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알고보니 지역에 좋은 커뮤니티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결심은 하였으나 처음 요가교실에 나갔을 때는 모든 것이 어색했다. 옷차림도 어색했고(나는 아직도 몸에 붙는 옷을 입지 못한다) 몸짓도 서툴렀으며 가장 어려운 일은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40년을 줄곳 정장 차림을 하고 교단에 섰던 나였기에 내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 같았다. 몸만 굳어있었던 것이 아니라 더 문제는 내 마음의 딱딱한 껍질이었다. 이 껍질은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서 더욱 두드러죠보였다. 한번도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아 본 적이 없었던 나였다. 부적응자가 된듯 마음이 힘들었다.


동료 교수 생각이 났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던 동료 교수가 있었다. 그 친구는 늙어가는 자기 몸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단다. 그래서 큰 결심을 하고 시작한 일이 동네 댄스교습소에 등록하는 일이었다. 쭈뼛거리며 학원에 다닌 지 한 주 뒤 원장이 자기를 조용히 부르더니 “내일부터 나오지 말아 주세요”라고 하더란다. 분위기 버린다고 했다나 어쩌나. 그 소리를 듣고 우리는 엄청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껍질이 나에게는 어쩌면 더 단단할 지도 모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마냥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는 생경함을 참으며 불가피한 일이 없는 한 꾸준히 요가 교실에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A와 눈이 맞았다. 아마 동향의 말투에서 친밀함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요가 후 양재천을 함께 걷던 우리는 대화 중에 우정을 발견하였다. 함께 별다방에 가서 차를 마셨다. 그것이 우리 모임의 시작이었다. 그 후 B가 눈에 띄었다. 백발이 그렇게 어울리는 사람은 보기 어려울 정도로 B는 백발이 멋있었다. B와 대화를 나누다 나는 그녀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를 별다방으로 초청하였다.

우리는 딱 한 시간으로 정하고 요가 후에 별다방 모임을 계속하였다. 우리 모임에 C가 들어왔다. C는 손끝이 매운 야무진 여인이었다. 거기에 우연히 자리를 함께 했던 D와 E가 고정 멤버가 되면서 이 모임에 출석하는 인원은 대여섯 명으로 늘었다.


우리의 화제는 언제나 무궁무진하다. 저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다 보면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커져 주변 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기도 한다. 내가 전에 경멸해 마지않던 모습이다. 그러면 목소리를 줄이자고 하다가 어느새 우리 목소리는 다시 좌중을 압도하는 소음으로 변해 있다.


대통령 선거 때는 정치를 개탄하느라고 열을 올리기도 했지만 우리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화제는 단연 가족 간의 갈등이다. D는 얼마 전 아버지가 폐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남편을 잃고 치매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하는 홀로 남은 어머니의 부양 문제가 가족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 듯했다. D는 눈물을 글썽이고 우리들은 나름의 지혜를 짜내 D를 위로하고 가능한 방법에 대해 조언을 하느라고 머리를 맞대었다. 그 처방을 위한 각자의 지혜를 모았다.


수다모임의 누군가가 눈물을 보이면 우리는 함께 슬퍼하고 누군가에게 기쁜 일이 있으면 우리는 함께 기뻐해준다. 누군가의 슬픔에 함께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는 내가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부터 늘 해오는 고심이다. 나의 단단한 껍질 속에 갖쳐있을 때 나는 타인을 냉정하게 평가하였고 타인의 어리석은 행동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MBTI의 분류에 의하면 나는 ENTJ형 인간이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의 특성상 감성적인 능력이 부족한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내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염원하였다. 나의 기도를 전능하신 하느님이 들어주셨는지 나는 근래에 타인의 아픔에 나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나를 발견한다. 수다모임을 하면서 친구들에게 내 마음의 아픔도 솔직하게 드러낼 줄도 알게 되었다. 수다모임이 그냥 시간의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큰 소득이 아닐 수 없다.


대여섯 명이지만 개성이 뚜렷한 것도 재미있다. D가 아버지 일로 슬퍼하면 E가 간암으로 죽은 남동생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며 끼어든다. E는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여인이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 항상 화제를 자기편으로 낚아채 간다. 다른 찬구들의 말없는 짜증을 감지한 나는 세미나의 좌장 경험을 살려 화제를 공평하게 나눠주기 위해 애를 쓴다. 대개 E에게서 말꼬리를 뺏어와 다른 친구에게 안기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E는 나에 대해 떨떠름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A는 건강염려증이 심한 사람이다. 작년에 목에 난 혹이 양성 암으로 판정이 나면서 큰 수술을 받았다. 그래서 단 것도 먹지 않고 차도 언제나 말차를 마신다.

B는 우리 모임의 보석이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는 동안 B는 우리에게 시를 읊어주기도 하고 책을 읽은 독후감을 이야기해 주기도 하고 영화나 전시회의 새 소식을 알려주기도 한다. B가 있어 우리 모임의 품격이 단연 높아진다.

C는 살림에 대한 철학이 확고하다. 자기 손으로 빵을 굽고 나물요리를 하여 영감님과 딸 내외와 손자들을 건사한다.

D는 우리 가운데 제일 젊은이이다. 언니들이 고리타분한 생각에 젖어있으면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다. 그녀가 제일 잘하는 충고가 며느리를 대하는 시어머니의 태도에 대해서이다. “언니들, 그러면 안 돼요”.라고 그녀가 정색을 하고 시작하면 나는 그녀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다.

E도 가족 관계에 대해 나름의 지혜를 터득한 듯하다. 언제나 그녀가 하는 충고는 “시간이 지나면 한 가족으로 동화될 테니 좀 기다려보세요”라는 말이다.

사실 나도 그렇지만 A, B 언니들도 이제 막 며느리를 보았기 때문에 새 며느리와의 관계가 조심스럽다. 그럴 때 젊은 사람들의 충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는 모두로부터 배운다. 삶의 지혜를 배우고 살림요령도 배우고 어느 병원의 어느 의사가 유능한 지의 정보도 듣는다.


어느 날은 자녀 양육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자녀양육은 이미 지났을 나이들인지라 손자녀 양육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요즈음 나는 자녀 양육과 관련된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다. 내가 읽은 책 이야기를 하자 B가 말하였다.


나는 손자가 생기면 시를 읊어주고 싶어.

아! 그때 내 머리에 전기가 팍 왔다. 손자에게 김소월의 <진달래꽃> 시를 읊어주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라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아! 이런 시를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더라면 요즈음 사회를 경악케 하는 데이트 폭력이니 치정 살인이니 하는 막장 사태가 생기지 않을 것을!


그런데 B 언니의 아들이 너무 늦게 결혼하였다. 본인도 마흔 후반인 데다 아내도 마흔이 넘었다. 그래서 언니의 희망 사항을 듣는데 이루어질 수 없는 꿈 같이만 여겨져 마음이 안타까웠다. 그런데 어제 그제 언니의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B언니가 손자를 품에 안고 시를 읊어줄 수 있게 될 모양이다. 여태껏 들은 이야기 중에서 최고의 굿뉴스이다. 내가 괜히 눈물이 난다.


이렇게 나도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며 살아간다. 성공적인 지역사회 적응이라고 자화자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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