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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문화와 유저 번역의 시작

게임 번역의 필요성

by 병욱

2023년 중국 항저우, 아시안 게임의 한 종목에서 대한민국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종목의 이름은 e-Sports 리그 오브 레전드. 그 누가 알았을까? 만악의 근원으로 평가받던 게임으로 국가가 나서서 메달 경쟁을 하는 것도 모자라, 대한민국에 금메달이라는 영광을 가져다줄 거라고...


출처-스포티비나우 중계 화면


케이블 방송도 아니고, 유튜브 영상도 아니고, 대한민국 3사 대표 공영 방송에서 스타크래프트 테란의 황제 임요환이 "누군가가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같은 것이 느껴지나요?"라는 질문을 들은 게 불과 20년 전 일이다. 그 당시만 해도 오락실에 간다는 건 무서운 형들이 있는 위험한 장소로 가는 거였고, 피시방은 (금연 시스템이 안착하기 전이라 더 그랬겠지만) 불량 청소년의 집합소 취급을 받았다. 피시방 한번 갔다 오면 온몸에 담배 냄새가 배곤 했는데,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정말 꿋꿋하게 피시방 다녔던 기억이 있다. 당연히 부모님으로서는 하나뿐인 자식이 옷에 담배 냄새를 묻혀서 집으로 들어오니 걱정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안 갈 수도 없었다. 그때 난 던전앤파이터를 자주 했었는데, 피시방에 가면 글쎄... 피로도를 1/3이나 더 준다는 거 아닌가? 안 갈 수가 없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걱정되셨을지 이해 못 할 건 또 아니다.


HoYowave-20241021-190209.png 임요환 曰 "난 누구, 여긴 어디?"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피시방은 피시 카페라 불릴 정도로 식음료 판매가 주 수입원인 사업장이 됐다. 당연하겠지만 흡연 문화도 조금씩 바뀌면서 대부분의 좌석이 금연 좌석으로 변했고, 요즘에는 커플석, 팀플레이석 등 금연 좌석 이상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삶의 바로 곁에서 느낄 수 있는 이런 단순한 서비스의 변화는 물론, 게임 산업 전체의 규모도 많이 커졌는데 2022년의 총매출액 22조 2,149억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 산업인 영화가 2023년 총매출액 1조 7천억이라는 걸 고려하면 아주 큰 변화다.


2023 대한민국 게임백서


산업의 규모라는 게 어찌 보면 꽤 추상적이라서 피부에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일례로 살아 있는 전설 프로 배구 선수 김연경의 연봉이 8억인데, 페이커 선수의 연봉은 100억 단위로 추측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온갖 나쁜 것들의 대표 주자로 낙인찍히던 게임이 2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지금은 최고 스타플레이어에게 100억이라는 연봉을 준다고 해도 믿을 만큼 그 규모가 커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게임 산업은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가파르게 성장하는 산업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하나의 리소스를 가지고 여러 곳에서 판매할 수 있게 만드는 게임 번역이 영향력을 키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1. 스타크래프트 1.16.1 립버전 한글판 다운로드

어릴 때 컴퓨터 좀 만져봤다는 사람이라면 항상 컴퓨터 기사 아저씨가 깔아주는 건지 어쩌는 건지 모를 스타크래프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저작권 개념이 없던 그 시절에는 컴퓨터를 구매하거나 기사 아저씨가 집에 방문하고 나면 어디서 온 건지 정체 모를 게임들이 깔려 있었는데, 스타크래프트는 가장 대표적인 예고, 타잔, 버츄어캅 같은 게임들도 그런 류 게임에서 한몫을 담당했다.


HoYowave-20241026-123116.png 스타크래프트
HoYowave-20241119-131128.png 타잔


재미있는 게임들이라서 이런 게임을 설치해 주고 가는 것에 불만이 있는 아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 아쉬움이 있다면 그 모든 게임이 한국어를 지원하진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본인이 직접 게임을 함에도, 그 게임의 이야기는 전혀 모르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다. 캐릭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한국인이라고 한국어를 다 잘하는 것도 아닌데, 영어까지 요구하는 건 당연하게도 비교적 과한 처사임이 분명하다. 심지어 게임 조작법도 가이드를 못 읽기 때문에 몸으로 부딪치며 배울 정도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screenshot-20250723-090113.png "Somebody help me!"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따라 하고 봤던 그 대사


그래서 이야기를 알고 싶었던 아이들은 인터넷에다가 '한글판'이라는 말을 같이 붙여서 검색하곤 했다. 물론 대부분은 바이러스로 인식되는 깨진 파일로 이루어진 쓰레기 리소스들이었지만, 간혹 게이머가 직접 번역해서 개발새발 기워서 만든 한글판이 있기도 했다. 그런 걸 보고 '드래프트'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사실 드래프트랑 유저 번역 한글판은 비슷한 개념일 뿐 같은 건 아니었다. 물론 그런 게 뭐가 중요했겠냐마는...


이처럼 자기가 하는 게임이 자국어로 서비스되길 바라는 마음은 인터넷이 한국에 태동하기 시작했던 그 순간부터 존재해 왔다. 제대로 된 서비스가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2. 왜 우리는 번역된 게임을 원했는가?

한국에서 인터넷이 제대로 보급되기 시작한 건 1998년쯤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23 인터넷 이용 실태조사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1999년 1.9%에 불과하면 초고속인터넷 가구 보급률이 불과 3년 만에 69%까지 치솟는다. 2004년이 되면 76.6%로, 10명 중의 7.6명(약 8명)은 인터넷을 집에서 사용한다고 보면 될 정도다.


screenshot-20250723-093509.png


그리고 이 보급률을 만든 것이 바로 '스타크래프트'였다. 비단, 스타크래프트 하나뿐만이 아니라, 이 시기는 장인 시절 블리자드의 게임들이 한국을 장악하던 시기였다. 1998년 스타크래프트를 시작으로, 2000년 디아블로 2, 2002년 워크래프트 3까지 '영어로 된' 게임들이 범람했고, 그 게임들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하지만 이렇게 범람한 게임 중에도 정작 한국어로 된 게임은 드물었다. 유통사인 한빛 소프트에서 유명세를 직감하고 한글 패치를 뿌리기도 했지만, 블리자드에서 공식적으로 한글을 지원한 건 아니었다.


근데 게이머들은 왜 그런 게임을 하는 거야?


게임의 유형에 따라 다르겠지만, 캐릭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이야기가 이어지는지 전혀 몰라도 재미있는 게임이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 같은 RTS 게임은 더 그랬다. 영어 단어와 문장은 읽지 못해도, 의무 교육 과정에 포함된 영어 수업을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알파벳 정도는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S를 누르면 SCV라는 일꾼이 생산되고, 마우스로 그 유닛을 드래그하여 미네랄에 갖다 대고 마우스 오른쪽을 누르면 유닛 생산을 할 수 있는 자원이 증가한다.


이 정도만 알면 게임을 즐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당시 유행했던 RTS 장르뿐만이 아니라, 서사보다는 조작성의 비중이 큰 게임이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재밌으면 장땡이었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게임을 반만 즐길 수는 없었다. 게임이 재미있으면 재미있을수록 더 알고 싶고, 더 이해하고 싶은 게 당연한 이치기 때문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조금 더 깊게 이해하고 싶은 건 게이머들의 당연한 '욕망'이었다.


3. 유저 번역의 등장

게임을 구매하든, 복돌판을 얻어오든, 실행 화면에는 어김없이 알파벳과 모르는 말들이 가득했다. 모양은 익숙한데, 사실 그 일러스트가 뭘 가리키는지,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게임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게 해 줄 누군가의 손'이었다.


20170802083843486_N156CY6C (1).jpg 어릴 때만 해도 난 스타크래프트의 철자가 ZTARCRAFT인 줄 알았다. 봐, Z처럼 생겼잖아?


이 손이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공식적인 무대가 아니었다. 바로 유저들, 그러니까 '게이머'들이었다. 컴퓨터에 능숙하고 영어에 관심 있던 몇몇 게이머들이 게임 대사를 일일이 추출해서 번역하고, 이를 텍스트 파일이나 수정 가능하게 만들어 둔 게임 데이터에 입혀 인터넷에 공개했고, 위에서 언급했듯 이런 것들이 '유저 한글화'등의 이름으로 떠돌았다. 당연하겠지만 전문 번역가가 작업한 게 아니기 때문에 문장이 완벽하지 않은 건 물론, 띄어쓰기, 맞춤법, 어휘 선택까지 투박함의 극치를 달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투박한 번역일지라도, 게임을 이해하는 데는 눈이 트이는 경험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의 유저 번역은 단지 언어를 바꾸는 걸 넘어 '게임을 공유하는 문화'의 출발점이었다. 일종의 봉사였고, 애정이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이런 소위 '능력자'가 적었기 때문에 만약 단 한 줄이라도 제대로 된 번역을 올리면,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킹갓제너럴' 번역자로서 존경받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스파게티 코드도 많았고, 한글 번역문을 입히더라도 한글 폰트가 클라이언트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적용이 안 되는 경우도 일상다반사였다. 이런 엔지니어링 부분을 제외하고서도, 캐릭터 대사를 추출하는 법도 몰라, 캐릭터 대사를 하나하나 받아 적는 건 당연지사, 영어 > 일본어 > 한국어 순으로 번역기를 사용해서 한국어를 만들면 조금 더 자연스럽다는 기술이 비결처럼 떠돌기도 했다.


이렇듯,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모두가 원했기에 탄생한 것이 '유저 번역'이었다. 번역이란 단어 자체가 무게 있게 느껴지던 시절, 이들은 '번역'을 생활 속으로 끌어내렸고, 동시에 게임을 우리말로 즐기려는 열망의 산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게임 번역의 시작은 '필요'에서 비롯된 게이머들의 욕망이었으며, '문화'로 꽃 피운 행동이었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게임 번역이라는 영역을 왜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첫 번째 해답이 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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