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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여사 Jul 11. 2023

남편의 양말

양말의 상태보다 방바닥을 걱정하다

우리 집 저녁 식사 준비는 나와 남편이 시차를 두고 나눠서 맡는다.

나보다 이른 퇴근을 하는 남편이 둘째와 함께 먼저 먹고(또는 내가 퇴근해서 남편이 차린 저녁을 같이 먹고), 독서실 갔다가 늦게 오는 첫째는 퇴근 한 내가 차려준다. 물론 남편이 바빴던 날은 외식도 자주 한다. 

먹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우리 부부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주로 저녁 메뉴에 관한 것이고, 혹시라도 남편이 늦게 되면 내가 부지런히 퇴근을 해야 한다. 


남편이 퇴근 후 상갓집에 다녀와야 한다고 해서, 서둘러 퇴근하고 둘째에게 스테이크와 웨지감자를 구워주었다. 팬 뚜껑까지 덮어가며 조심히 구웠지만 역시 공기 중에 떠다닌 기름으로 바닥이 미끄럽다. 맨발에 느껴지는 그 느낌이 싫어 청소기를 돌리고 뜨거운 물을 부어 물걸레질까지 했다. 거실을 정리하고 향초를 켜고 잠시 쉬고 나서 둘째가 잘 준비를 하는 동안 첫째가 먹을 저녁을 미리 해두었다.

(나는 깨끗하게 정리되고 좋은 향이 나는 우리 집 거실을 매우 사랑한다.)


아이들이 각자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고 혼자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니 이제 막 집에 도착한 남편이 방에 들어와 자기 발을 가리키며 양말을 보라고 한다. 평소 정장 차림을 거의 하지 않는 남편은 상갓집에 갈 때만 옷을 꺼내 입는데, 오늘은 잘 안 신던 구두까지 신었나 보다. 그런데 하필 그 구두가 문제였다. 거의 신지 않고 신발장에 넣어두었더니, 신발 내부가 다 삭아서 흰 양말 발등과 발바닥에 군데군데 검정 얼룩과 조각들이 붙어 있던 것이다. 

신발을 벗고 조문객들 사이를 지나 상주와 절을 하는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민망했을까.  

그냥 얼른 절하고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했다는데,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이미 얼굴이 벌겄다. 

장례식장 매점에서 검은색 양말을 팔텐데, 그거라도 사서 갈아 신고 들어가지 그랬냐는 내 말이 핀잔처럼 들렸을까. 남편의 표정이 좋지 않다. 

그걸 보는 난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나 오늘 밥 먹고 청소기 돌리고 물걸레까지 돌렸어. 빨리 양말 벗어.'


순간 남편의 얼굴에 떠오른 난감한 표정.






남편은 대체로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활달하고 외향적인 성격이라 항상 대화의 중심에 있다 보니, 그가 갑자기 말이 없거나 가만히 있으면 다들 의아해할 정도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얼굴.

자신보다 방바닥을 더 챙기는 나에 대한 서운함과 너무하다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차마 나에게 그 감정을 말할 수 없어 일시정지된 듯한 찰나의 시간.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지금 이렇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고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정말 아무 일이 없었던 것 같니? 

이렇게 살고 있는 내가 바보처럼 보이니?

나한테 어떤 대우를 받아도 무조건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도 모자랄 판에 너는 그렇게 서운하니? 

속으로 수많은 말을 삼키며 오늘도 또 이렇게 지나간다. 

그리고 하루 이틀 지나면 또 아무런 일 없었던 듯이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밥을 먹을 것이다. 






남편은 아마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내가 하자는 대로 할 것이다. 

매달리고 애원하고 사정하는 일 없이 나의 처분을 따를 게 뻔하다. 

자기가 무슨 염치로 더 바라겠냐고 하겠지.

그러나, 이제는 진짜 대화를 해야 한다. 피하고 모른척하지 않고 어떤 결론을 내더라도 이야기해야 한다. 

유일하게 우리 일을 알고 있는, 우리 부부를 너무 잘 아는 친구는 나에게 성급히 결론 내리지 말고 우선은 이렇게 흐르듯이 살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했고 나도 그렇게 해보려 했지만, 가끔씩 이런 상황과 마주치게 되면 분노가 솟구치고 마음이 급해진다. 

남편은 생각과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는 타입이라 아이들이 함께 있을 때는 이야기하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밖에서 술이라도 마시며 이야기하기에는 내가 감정 조절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이제 곧 여름방학이 되어 두 아이 모두 캠프로 집을 비우는 시기가 온다. 그때는 제대로 마주 앉아 뭐라도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대화를 피하는 건 남편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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