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메고 산으로 캠핑 가볼까?
나만의 비트와 템포로 정신없이 바쁘게 달려온 10대와 20대. 짙은 운무에 뒤덮여 한 치 앞만 겨우 보이는 이른 아침의 산길을 달려오기도 했고, 좌우가 분간되지 않는 어두운 밤의 내리막길을 정신없이 달리다 넘어져 구르기도 했다. 미처 주변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 학창 시절의 기억은 드문드문하다.
어린 시절 산악자전거에 몰두하며 두 바퀴로 달리던 산을 성인이 되어 두 발로 걷기 시작하자, 비로소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산을 걷다 친구를 만났고 산을 걷다 연인을 만났으며, 산을 걷다 결혼을 했고 산을 걷다 가족을 이루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결혼하며 처음으로 수도권 밖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인구 39만 명의 작지만 단단한 대한민국의 행정수도,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 중심부에는 전월산과 원수산이 솟아 있고, 구릉지대로 이루어진 가까운 북쪽으로는 해발고도 300m를 넘나드는 아기자기한 산들이 즐비하다. 남쪽으로 30분 거리의 계룡산이 있고, 동쪽의 속리산과 서쪽의 오서산까지는 한 시간 남짓이면 다다를 수 있다. 교외로 한번 나가려면 교통 체증으로 진통을 겪던 서울에서의 삶에 비하면 행복도시 세종은 낙원 같았다.
이 좋은 주변 환경을 두고 주말에 집에만, 동네에만 머무를 수는 없었다. 2016년 가을 무렵, 생후 200일이 채 되지 않은 아들을 둘러업고 도전한 세종시 둘레길 트레킹을 시작으로, 12월 결혼기념일에는 전북 부안의 내변산을 오르기도 했다. 2017년 첫돌이 지난 아들은 걸음마를 시작하며 아빠와 엄마의 손을 잡고 산길을 걸었다. 걷다 업히다, 안기다 걷기를 반복하던 아들은 자신의 네 번째 생일을 한 달여 남긴 2020년 3월, 드디어 처음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작은 산의 정상에 올랐다.
그 후로도 우리 가족은 특별한 일정이 없는 주말이면 늘 산에 올랐다. 엄마와 함께 오르는 날도 없지는 않았지만, 아내의 휴식권을 존중해주기 위해 아들과 둘이 나서는 날이 더 많았다. 맑은 날도 있었고 소나기를 맞던 날도, 발목 높이까지 눈이 쌓인 추운 겨울날도 있었다. 그 모든 날에도 나와 아들은 산을 찾았다. 힘들다며 칭얼거린 적도 없지 않지만, 정상에 올라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 머금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사진 포즈를 취하곤 했다. 오늘의 보람을 느끼고 내일의 산행을 기대하는 삶은 지친 일상의 활력이었다.
매 주말 이어진 야외활동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들의 성향과 취향은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이었다. 수줍음도 많은 편이었다. 내성적이고 표현이 서툴렀던 어린 아들에게 산을 다니며 마주하는 어른들과 주고받는 “안녕하세요.”라는 한 마디 인사는 사회성을 기르는 좋은 훈련이 되었다. 어린 꼬마가 등산화와 등산복을 갖춰 입고 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기특했는지, 지나가는 어른들은 “어이쿠, 꼬마가 대단하네!”, “이야, 넌 장래에 훌륭한 인물이 되겠다!”라며 덕담을 한 마디씩 건네주곤 했다. 처음엔 쑥스러워하며 몸 둘 바 몰라하던 아들도 차츰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조심히 내려가세요!”라고 인사를 주고받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평소와 같이 산을 찾았던 어느 날의 하산길, 우리는 산을 오르는 한 남성을 마주했다. 해가 뉘엿하던 때에, 쌀 한 가마니쯤 되어 보이는 거대한 배낭을 둘러메고는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며 홀로 산길을 올라가던 그의 뒷모습은 가히 찬엄했다.
“아빠, 저 아저씨는 왜 지금 산에 올라가는 거야?”
아들이 내게 물었다.
“아마 저 아저씨는 오늘 올라가서 내일 내려오려는 걸 거야. 백패킹이라는 건데, 나중에 아들이 조금 더 크면 아빠랑 같이 해볼까?”
밀려오는 어둠에 뒤를 밟힐까 걸음을 재촉하며 답했다.
백패킹(Backpacking)은 말 그대로 ‘백팩’, 즉 배낭에 야영 장비를 넣고 떠나는 여행을 일컫는 표현이다. 보편적으로 1박 이상의 야영을 포함하여 산과 섬, 해안 길 등을 걷는 여행을 지칭한다. 지나가듯 주고받은 얘기였지만 난 그날 이후로 백패킹이라는 세계를 찾아보며 동경하게 되었다.
‘아들과 함께 배낭을 메고 산으로 떠난다?’
상상을 거듭할수록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나와 아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결코 낮지 않았다. 곧잘 산행을 하는 아들이었지만, 성인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네 살 아이와 야산에 올라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한다는데 곱게 등 떠밀어줄 아이 엄마는 아마 세상에 몇 없을 거다. 게다가 하룻밤의 오토캠핑을 위해 자동차 트렁크도 모자라 좌석 구석구석까지 짐을 구겨 넣어야 겨우 다 실을 수 있는 수많은 캠핑 장비를 달랑 배낭 하나에 모두 짊어지고 떠난다? 이 또한 선뜻 계산이 서지 않았다. 언젠가 아들이 조금 더 크면, 그때 다시 고민해 보리라 생각하며 백패킹을 향해 타오르던 투지를 잠시 접어 둘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일 년이 지났다. 다섯 살의 어린이날 예기치 못한 부자(父子) 캠핑이 이루어졌고 ‘아빠와 함께 캠핑을 또 갔으면 좋겠다’라는 아들의 바람에 부응하기 위해 그 후로 연거푸 두 번의 캠핑을 더 다녀왔다. 나름 아들과 꽤 친한 아빠라 자부했지만, 사실 엄마의 조력 없이 보낸 남자 둘만의 첫 외박은 적잖은 긴장 속에 이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 없이 아들과 단둘이 보낸 밤은 고열로 인한 입원 치료 때문에 함께했던 병실이 전부였으니까.
그랬던 우리는 이제 제법 친해졌다. 덕유대야영장에 이어 전월산 국민여가 캠핑장, 그리고 금강 자연 휴양림에서 세 번의 부자 캠핑을 겪으며 긴장은 희미해졌고, 즐거움과 기대감이 커졌다. 아빠와 아들, 둘만의 여정에 용기가 생긴 거다.
문득 아들과 함께하는 백패킹에 도전한다면 지금이 가장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엊그제 생일이 지나 만 다섯 살이 된 아들의 체력과 에너지는 날을 거듭할수록 넘쳐났고, 자연 속에서의 하룻밤은 서로가 거리를 두어야 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제일 나은 선택일 것 같았다. 최근 곧잘 아빠를 따르는 아들 덕분에 우리 둘의 여정을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호의적이었고, 때마침 소위 ‘100일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통 잠’을 자기 시작한 2호기 덕분에 아내에게 조금은 덜 미안한 마음으로 집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날 침대에 누워 잠들 준비를 하는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 우리 배낭 메고 산으로 캠핑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