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
산중에서의 하룻밤을 무사히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산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덕분일까. 혹은 백패킹의 매력인 걸까. 여느 캠핑장에서의 아침과는 사뭇 다른 개운함이 몸을 휩싼다.
침낭 지퍼를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아들 굿모닝! 잘 잤어? 춥진 않았어?”
“굿모닝! 하나도 안 추웠어!”
밤사이 떨어지는 기온에 혹시 감기라도 걸렸으면 어쩌나 염려했지만 다섯 살 아이는 찡긋거리며 눈을 뜨고는 세상 밝은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함께 침낭을 접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옅은 안개가 내리깔린 전월산의 아침. 온기가 조금 남은 보온병의 물을 아들과 한 모금씩 나눠 마시며 이야기꽃을 싹 틔웠다. 배낭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던 어제의 산행 이야기, 지난밤 잠든 이야기, 밤새 바람에 펄럭이던 텐트 이야기, 자욱이 내리깔린 안개와 저 멀리 보이는 아침 일출의 이야기까지. 그리고 뒤이어 준비해 둔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오늘처럼 배낭에 텐트를 넣어와서 하는 캠핑을 백패킹이라고 해.”
“백패킹?”
“응. 지난주에 다녀온 건 캠핑! 오늘은 백패킹! 넌 오늘부로 ‘백패커’가 된 거란다, 아들!”
“아빠, ‘백패커’가 뭐야?”
“백패커란 LNT를 실천하는 멋진 숲 탐험가들이야. 산행하며 숲 속을 탐험하고, 텐트를 칠 수 있는 바른 곳에서 야영하며 자연과 교감하는 사람들이야.”
LNT, 풀어쓰면 Leave No Trace. 번역 그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라는 개념의 아웃도어 보존 활동으로, 20세기 중반 국제 비영리 기구인 ‘Leave No Trace’가 미국의 자연보호구역에서의 무분별한 여가 활동에 대응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산을 찾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우리 LNT 합시다.”라는 인사를 서로 주고받기도 한다.
LNT를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저마다의 입장차는 있을 테지만, 국내 백패커들이 일컫는 LNT란 다음의 일곱 가지를 함의한다고 본다.
• 쓰레기는 모두 가지고 내려올 것
• 화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불을 이용한 취사를 하지 않을 것
• 야영이 금지된 장소에 설영 하지 않을 것
• 설영을 하는 과정에서 목조 데크 등의 구조물을 손상하지 않을 것
• 진로를 막는 등 등산객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
• 야생 동물이나 식물을 해하지 않을 것
• 정식 탐방로 외 비법정 탐방로 또는 입산 통제 구역에는 발 들이지 않을 것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의 영어식 표현 같다고 할까? LNT는 비단 백패커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산행을 즐기는 등산객은 물론이고, 국립공원 등 자연경관이 멋들어진 명소를 찾는 관광객, 해변이나 계곡을 찾는 피서객과 노지를 찾는 캠퍼들까지, 아웃도어 활동을 즐기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이 개념을 백패킹을 통해 아들이 자연스럽게 체득하고 몸에 배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LNT란 다시 말해서 ‘원래 있던 모습 그대로 보전한다.’라는 뜻이야. 앞으로 우리 백패킹도 하고 산행도 하면서 다녀간 흔적을 남기지 않는 건강한 백패커가 되도록 하자, 아들!”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아들은 적어도 우리가 하룻밤 머무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준 산과 자연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는 것 한 가지는 이해한 것 같았다. 아들이 가지고 놀던 나뭇가지와 돌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시작한 사이, 나는 텐트와 야영 장비를 정리했다. 정리를 마친 후에는 함께 주변을 돌아다니며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 종량제 봉투에 담았다.
캠핑이든 리조트든 혹은 펜션이든, 여행지에서의 마무리는 늘 머물렀던 공간에 “안녕~ 잘 있어~ 다음에 또 만나~!”라고 인사를 건네는 다섯 살.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멋진 하룻밤을 선물해 준 자리에 작별 인사를 하려는 찰나, 아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빠, 어떻게 해? 흔적이 남았어……!”
아들이 시선은 아침 이슬이 내려앉은 목조 데크 바닥 중앙에 마름모꼴의 텐트 자국에 닿아 있었다. 빙그레 미소를 띤 나는 오늘 아침 아빠가 해준 얘기를 귀담아 들어준 기특한 다섯 살의 손을 꼭 잡고 어제 왔던 길을 거슬러 오르며 다음 여정을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