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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형 Sep 05. 2023

08_오늘은 에너지 몇 개짜리야?

“안녕, 난 서진이라고 해!”


아들에게 낙원으로 기억된 강천섬에서 아쉬웠던 단 한 가지, 배를 타지 못한 서운함을 풀어주기 위해 이른 아침, 남쪽으로 달려본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매물도’.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에 속한 섬으로 둘레가 6km도 채 되지 않는 그리 크지 않은 섬이다. 매물도의 남서쪽에 위치한 소매물도와 쿠크다스 섬이란 별명을 지닌 등대섬이 더 잘 알려져 있다. 매물도에는 폐교된 한산초등학교 매물도 분교에 조성된 유료 야영장이 있다. 운동장 터는 캠핑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학교 건물에서는 개수대와 샤워실,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


경상남도 거제시 남부면 저구리의 어촌정주어항(漁村定住漁港)인 저구항에 도착했다. 우리가 탈 배는 120톤급의 작은 선박, 정원 275명의 일반여객선으로 매물도 당금항까지는 30분이면 충분하다. 각자의 배낭을 둘러메고 배에 탄 우리는 지나온 길을 조망하는 2층 갑판 위의 목재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대부분 가벼운 배낭을 메거나 카메라를 한쪽 어깨에 걸친 관광객들이었고, 그 틈에 박배낭을 둘러멘 백패커들이 몇몇 보였다. 아마 토요일인 어제는 무거운 등짐을 짊어진 백패커들이 가득했겠지 싶었다. 새우과자를 손에 들고 바닷바람과 갈매기의 사이에서 줄타기에 열중해 있던 중 매물도 하선을 준비하라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사진과 영상으로 익히 보았던 ‘당금안내소’와 ‘당금구판장’ 간판이 참 반가웠다. 구판장으로 들어가서 야영장을 이용하러 왔다고 신고하고, 비용을 지불했다. 구판장 사장님은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넌 안 내도 돼~” 라며 미소를 날려주었다. 그리고는, 흡사 작은 경운기를 연상시키는 삼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며, 뒤에 타라는 시늉을 하시는 사장님.


“괜찮습니다. 저흰 걸어가도 돼요.”

“어차피 저도 야영장에 올라가려던 참이에요. 사양 말고 타요. 아낀 힘으로 아들과 섬 한 바퀴 돌아봐요.”


그렇게 우린 삼륜차를 얻어 타고 폐교에 도착했다. 서너 동의 텐트만 자리한 여유로운 매물도 야영장.


바다가 바로 보이는 한적한 잔디 위에 먼저 체어를 조립해서 아들을 앉히고 오늘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라운드시트를 깔고 바다 한번 바라보고, 이너텐트(Inner tent) 세우고 아들 한번 바라보며 여유롭게 텐트를 설치하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또 다른 꼬마가 다섯 살 옆으로 다가왔다.


“와. 니 스테고사우르스 있네. 내도 그거 있는데. 니는 몇 살이고?”

“난 다섯 살인데!”

“내도 다섯 살이다. 난 해군유치원 소망반 이시하다, 니는?”

“나는 더숲어린이집 난초반 박서진이야.”


그렇게 아들은 낯선 매물도에서 또래 친구가 생겼다. 그 덕에 한결 여유롭게 텐트를 치고 침낭을 펼치며 오늘의 보금자리를 완성했다. 또래 친구의 부모와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우린 섬 한 바퀴를 돌아보러 가려는 참인데 혹시 함께 걸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만 시하는 아직 오래 걸어본 경험이 없어 무리될 것 같다고 했다.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남기고 방울토마토와 마실 거리 정도를 가볍게 챙겨 매물도 해품길 트레킹에 나섰다.


“아빠, 오늘은 에너지 몇 개짜리 코스야?”


에너지. 그 시작은 아이와 산행을 시작하던 작년 무렵, 긴 언덕 앞에서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당근조로 내밀었던 과일맛의 츄잉캔디, 즉 캐러멜이었다. “이걸 먹으면 힘이 나! 그래서 에너지라고 부르지!”라며 내밀었던 캐러멜을 아이가 지칠 때마다 하나씩 입에 넣어주었는데, 언젠가부터 이 캐러멜의 개수가 산행 난이도의 지표가 되었다. 집 근처의 해발 251m 원수산은 에너지 두 개짜리 산. 첫 백패킹이었던 해발 260m 전월산은 에너지 세 개짜리 산, 그리고 왕복 7km의 조치원 오봉산은 에너지 네 개짜리 산이다. 오늘의 해품길은 약 5km 거리로 그리 어려운 코스는 아니지만 익숙하지 않은 초행길이고 거리가 제법 되니 넉넉히 불러본다.


“음, 오늘은 에너지 여섯 개 줄게! 사실 세네 개면 충분한 코스인데, 오늘 차 타고 배 타고 멀리 오느라 고생했으니깐 넉넉히 주는 거야!”

“여섯 개라고 해서 깜짝 놀랐네! 알았어, 아빠! 그럼 출발 에너지부터 줘!”


달콤한 캐러멜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완만한 언덕길을 따라 20여 분 올라오니 등 뒤로 매물도 야영장의 전경이 펼쳐졌다. 마치 드론으로 항공 촬영을 한 것 같은 멋진 뷰를 감상하고 있는데, 저 멀리 빨간색 캡모자를 쓴 꼬마가 점차 가까워져 오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아빠! 저기 시하가 오고 있나 봐!”


함께 해품길을 걸으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눠보았다.

경남 진해에서 베이커리를 운영하고 있다는 젊은 부부, 시하가 아직 산행 경험이 적어 가능한 주차장에서 멀지 않은 거리의 박지나 야영장, 또는 섬 여행을 위주로 캠핑과 백패킹을 즐기고 있다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러며 평소 같았으면 선뜻 섬 트레킹에 나서겠다는 용기를 내지 못했을 텐데 오늘 처음 만난 또래 친구 덕분에 걷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며, 시하가 이렇게 오래 걷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다.


두 친구는 서로를 의지하며 섬 한 바퀴를 돌았고, 우리는 시종일관 즐거움 가득 머금고 걸어준 두 아이가 대견스러웠다. 그늘 한 점 없는 매물도 야영장으로 돌아왔다. 작은 알파인 텐트 한 동 달랑 펼쳐 놓은 우리 집과 다르게 시하네는 긴 터널형의 텐트에 8명도 족히 앉을 수 있을 크기의 커다란 타프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부부는 자신들의 타프 아래에서 함께 식사하면 어떻겠냐며 초대해 주었고, 각자 준비해 온 저녁거리를 함께 나누는 사이에 밤이 깊어 갔다.


“울 아빠가 만든 빵 진짜로 맛있다. 니 꼭 먹으러 온나.”

“그래, 다음에 꼭 다시 만나!”


이튿날 다시 만나자는 인사와 함께 첫 배로 먼저 떠난 시하 가족과는 이후 경북 봉화의 백천 계곡에서 함께 물놀이를 즐기기도 했고 청옥산 야영장에서 캠핑도 즐겼다. 매년 성탄절 즈음이면 가족들과 둘러앉아 시하 아빠가 전통 방식으로 만든 슈톨렌(stollen)을 음미한다. 그럴  때면 아들은 또래 친구와 함께했던 매물도에서의 그날을 추억하며 묻는다.


“아빠, 우리 시하랑은 언제 또 함께 백패킹 가?”      


해품길 뒤 편으로 보이는 매물도 야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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