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에서는 법칙이 성립되지 않는 상태나 현상, 수학에서는 함수가 정의되지 않는 특정값을 의미한다.
어쩌면 특이점은 “암흑에너지”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는 했지만, 아직 인류는 특이점을 다룰만한 지식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형이상학은 전통적으로 존재와 존재자, 즉 존재를 모든 것의 속성으로 인식해 왔다. 무(無)도 존재의 부재, 부존재로 해석했다. 철학의 반석이 “존재”의 개념 위에 세워진 셈이다.
그러나 존재의 존재, 존재의 상위 개념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거기까지가 서양철학의 한계다. 특수형이상학이 초월적인 존재를 언급하지만,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 “믿음”이 바탕이 되는 종교적인 공상일 뿐이다.
“존재”의 인식으로부터 “인과율(因果律)”이라는 공식이 나왔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경험적 논리로 “필연”이라는 귀납적인 해가 나왔다.
그러나 “필연”은 인간의 착각과 오해에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의 감각과 인식의 한계로 인해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事故)였을지도 모르겠다.
“우연이 모든 것의 원리”라는 자크 모노의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양자역학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나의 존재”를 살펴보면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이다.
수억 개의 정자 중 하나가 우연히 수정에 성공했고, 배우자도 우연히 만난 사람이다. 나와 배우자의 부모 또한 우연히 만났으며 그들 조상도 우연히 만나 자식을 낳았다. 먼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지구와 태양도 먼지 성운 속에서 우연히 생겨났고, 생명체가 살기 좋도록 둘 사이의 거리가 적당히 떨어져 있는 것도 우연이다.
6500만 년 전 공룡을 멸종시켰던 운석의 궤도가 0.1도만 틀어졌어도 지금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빅뱅에서 지금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우연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우연은 생명체 내에서도 작동한다. 200개 아미노산으로 이루진 단백질에서 199개의 아미노산 배열을 알아냈다 해도 하나의 아미노산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면 전체가 어떤 단백질이 될지 예측할 수 없다. 단 하나의 우연으로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주사위 놀이도 비슷한 경우다. 동전 앞면이 199번 연속적으로 나왔다 하더라도 200번째가 어떤 면이 나올지는 알 수 없다. 매 순간순간이 독립적인 사건이다. 여기에 “필연”이 끼어들 틈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불연속의 세계다. 공간적으로는 플랑크상수라는 틈이 있고, 입자는 불확정성 원리라는 불확실한 정보로 포장되어 있다. 에너지도 띄엄띄엄 불연속이다. 시간도 상대성이라 관측자에 따라 들쑥날쑥하다.
불연속의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수학적인 개념, 함수로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로 인해 물리법칙으로 도출되는 정보는 근사치일 수밖에 없다. 유클리드에서 말하는 완전한 원이나 삼각형은 실제 자연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매끈한 선으로 연결된 윤곽은 관념 속에서나 존재하는 상상의 산물이다.
미적분도 유클리드와 같은 상황이다. 함수가 불연속일 때 대부분의 미분방정식 해는 구할 수가 없다.
불연속인 것을 “연속”이라고 가정하고 해를 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풀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선으로 연속되어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방정식의 해는 근사값이 될 수밖에 없다.
뉴턴역학도 마찬가지다. 미시계의 통계적 평균치를 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역학은 아예 확률값으로 스스로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양심 고백한다.
특이점이 안개처럼 펼쳐져 있는 점묘화의 세계, 우리는 단지 특이점이 연출하고 있는 모호한 모습만 인식할 뿐이다. 그 패턴을 추적하여 근사치를 찾는 것이 물리학이고, 논리적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수학이다.
근사치라 해도 인간의 감각이 미시세계에 도달할 일이 없기에 인식에는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무지개 속에는 수많은 색상과 채도가 숨겨져 있지만, 감각의 한계로 몇 가지만 볼 수 있는 경우와 같다.
빅뱅이 특이점에서 출발했지만, 그 이후에도 특이점 세상이기는 마찬가지다. 거시계의 특이점이 미시계의 특이점으로 잘게 부서진 것뿐이다. 빅뱅 시작이나 이후나 우주의 구성 요소가 “특이점”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입자 하나만 놓고 봐도 그 자체가 이미 특이점이다. 오비탈에서 보듯 입자의 존재 여부 자체가 확률적이다. 모든 정보가 특이점에 함몰되어 있기에 입자 하나에서조차 우리는 근사치 이상의 정확한 값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특이점은 우연의 출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보가 은폐되어 예측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처럼 끊임없이 우연을 생산하는 우연의 원천이자 “존재와 무”의 상위 개념. 모든 것이 특이점으로 환원되는, 특이점으로부터 "존재와 무"가 창조되고 둘의 상호작용이 우연이라는 현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
“신들조차 우주 만물 이후에 탄생하였으니 우주가 어디서 생겨났는지 그 누가 알겠느냐?” 힌두교 베다 경전에 있는 내용이다. 우주 만물이 우연의 산물이니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조차도 특이점이 창조한 우연한 존재일 것이다.
형이상학이나 종교적인 공상과 달리 특이점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학문(물리·수학)적으로 실재하는 실체라는 것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다. 특이점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특이점이 존재하는 방정식 하나를 놓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방정스럽게 방정식을 보는 이유는 그것을 풀려는 것이 아니라 특이점을 감상하기 위함이다.
빅뱅의 시작점, 존재와 무가 수프처럼 뒤섞여 얼어버린 미지의 정체, 냉동된 신비로 덮여있는 이 미지의 실체는 들여다볼수록 멀미가 난다. 양자중첩처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공즉시색 색즉시공.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도 그러하니라.”
명상인지 공상인지 모를 흐릿한 생각의 스펙트럼에서 반야심경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우연의 생성과 소멸, 특이점의모습을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우연이 우연을 생성하고, 우연 스스로가 종말을 맞는 경계선에서 나는 특이점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모든 것이 생멸하고 뒤섞이는 특이점의 지평, 그 경계선에서 "소멸이냐? 생성이냐?"는 부채도사의 부채가 어느 쪽으로 넘어가느냐의 상황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채가 어느 쪽으로 넘어가든 그것은 순전히 부채도사 마음에 달려있다.
반야심경과 부채도사? 쓰다 보니 생뚱맞게 괴상한 조합이 튀어나온다. 조현병만큼이나 이질적이고 발칙적인 망상! 나 지금 제정신으로 글 쓰고 있는 거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