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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인셋 Jan 11. 2024

나르시시스트는 얼마나 위험한가

답글에서 얻은 소재 1


이것은 저격글 따위가 아니다. 나는 그럴 위인도 못되고, 밖에서의 사회생활이나 매한가지로 손가락 하나 놀리는 일이라 해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내가 평소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것을 통해 사고하는 것처럼, 내 글을 읽은 분들이 보여주신 공감과 의견 또한 역시 그 재료가 되었기에 다시 한번 내 생각들과 버무려져 재생산된 일, 그뿐이다.


끊이지 않고 내 글에 등장해 온 갈등과 미움, 이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런 민감한 소재에 대해 실제 주변인을 통해서는 웬만하면 날을 세우고 있지 않은 대표적인 의견을 들을 뿐이라,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이 좀 더 세상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 표본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내 글은 단지 어딘가에 말하지 못할 내 헛헛한 속을 풀어내는 용도였을지 모르나, 누군가의 공감을 샀다는 건 그만큼 같은 일로 아픈 이도, 이겨내며 살아가는 이도 많다는 걸 뜻했다. 여전히 표현하지 못하지만, 이곳에선 익명의 짧은 글이 내게 큰 위로나 응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만큼 크게 통쾌하거나 속이 시원하진 못했다. 일말의 죄책감이나 역시 세상엔 이런 사람이 또 있었지 라는 깨달음이 한몫했다. 사람의 직접 대면이든 아니든, 감정적인 대응은 내 체면만 깎아먹는 일이다. (그럼에도 가끔은 내 속의 말을 다 하고 사는, 드라마 속 문제의 캐릭터로 살고 싶을 때도 있다.)




모든 공감과 부정의 글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나 또한 가정환경에서 온 나의 문제와 내 본질의 결핍을 깨달아가는 중이고 그럼에도 나름의 내 삶의 멋을 찾아가고 있지만, 세상의 편견이 생의 어느 순간엔 나 자신에게도 흠칫하고 놀라는 바로 그때에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아파서 쓴 글이지, 이해 못 해서 쓴 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세상의 갈등은 내 입장에선 '조건'보다는 내게 유리할 '이상'에, 누군가에겐 '이상'보다 본인에 유리할 '조건'으로 나뉘는 데서 오고 만다. 이는 따지고 보면 생존전략이니 누구 탓할게 못 되지만, 그럼에도 나는 '논리'는 역시 '이상'쪽에 훨씬 부합한다고 여긴다. (이 또한 나만이 옳다고 여기는 논리인지 모른다.)


자신의 삶의 경험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만들게 마련이고 누구나 경험은 다르지만, 살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내가 아는 것만이 진리라는 닫힌 마음과 내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는 오만이다. 아직 누군가에 비하면 긴 생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러는 내게도 인간관계에서 두고두고 힘들었던 일을 돌이켜보면 단연 1위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내면으로 포장해 둔 자아와의 불일치로 스스로는 예민하나 되려 주변에는 무심하고,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주변인에게 강요와 불편을 초래하는데도 이를 인지하지 못해 늘 분란을 야기한다. 자신을 아끼는 일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는지의 여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 모진 지점이 꼭 나로 하여금 펜을 들게 했다.


그들이 남이 불편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것을 주장하는 건지 (모두를 대변해 총대를 메는 부류라면 칭찬할 일이지만 - 아주 가끔 그럴 때도 있다.), 그저 주장할 뿐인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물론, 사람은 입체적이라 그런 면모가 있다 하여 온전히 다 나쁜 사람인 것도, 모두가 막말을 하는 교양 없는 사람인 것도, 현실에선 상종 못할 그런 부류의 사람도 아닐 때가 많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사회에서 눈치와 사회흐름을 잘 읽어내어 정말 성실하게 괜찮은 '조건'을 일궈낸 사람도 많다. 바로 거기서 온 자기애일지도 모른다. 그 끈질기게 더 견고해져 버린 자기애가 주변인에겐 고통일 뿐. 그들은 모른다. 늘 너를 위한 것과 희생이라는 전제 하에 가학적인 본인만의 잣대를 사랑하는 이에게 끼워 맞추고 있는 것임을.


그 관계가 내 핏줄일 때, 결혼으로 맺어진 것일 때, 고통은 기약 없는 것이 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까운 만큼 한없이 깊어진다. 내 생에 겪은 미움이 이 정도라면 그만큼 흔하다는 것이니, 우리에 가둬두지 않는 한 피할 수 없고 그 우리 또한 한 개인의 자립에 좋기만 한 것이었는지는 생의 끝에 가서야 평가받을 일이다.


개인의 장단점을, 건강과 가족과 성격과 경험까지 - 이력서처럼 처음부터 모두 드러내고 다닌다면 관계라는 건 이어질 수 있을까. 인간의 불확실한 본질을 놓고 본다면 미래를 왔다 갔다 한다는 것만큼 허황된 말 같다. 나의 이력서에 남이 써줄 말을 온전히 다 아는 이가 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함부로 모진 말을 해도 되는 정도의 사람일까.


늘 껴안고 살아야 할 질문이다.

오늘도 조금 더 넓어진 시야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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