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안다는 것은 착각
살면서 어느 포지션에 자리를 잡아야 하나, 이 많은 세상 사람들 중 난 어디쯤에 있나 늘 재보게 되는 때가 있다. 어떤 측면의 나를 가장 측정하고 싶은가요라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의 모습 중 내가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혹은 지고 싶지 않은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모든 것을 놓고 경쟁하고 살지는 않지만, 그건 저마다 다를 것이었다.
나는 돈, 외양 같은 건 살면서 수단으로써는 늘 좇을 수밖엔 없는 가치이기는 하나 1번이 될 건 절대 아니라 여기며 꾸준하게 인간성과 성격 형성에 집착해 왔다. 그런 결과로 실은 대단한 인품을 갖게 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회 부적응자라 낙인찍힐 정도로 문제 있어서도 아니지만.. 되려 내 타고난 것을 극복하려 발버둥 치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유로는 내 속에 가진 것이 평범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다.
내가 자라며 가장 많이 보아 온 부모라는 두 성품의 집합체는 곧 나와 형제들, 두 분이 그렇게나 평행선을 달리며 싸워온 것처럼 내 안에선 쥐어 뜯어내고 싶은 성미와 내가 모델로 삼은 인격이 혼재되어 늘 싸우고 있었다. 나는 내 안의 문제로 늘 심리와 성격이란 것에 집착하며 살아왔다. 심리를 공부한 이에게서 반 전문가가 되었단 우스운 소릴 들었다. 아마도 철학이란 데 심취하게 된 것, 심리와 정신상태에 대해 누구와도 고민을 조금 나눠줄 수 있는 지경이 된 건 내 신경과 생각이 평생을 그곳에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을 떠도는 수많은 생각들은 늘 거기서 기인했다.
나는 그런 사람 하나만 있어도 3대의 모든 가정이 콩가루가 될 수밖에 없던 요소인 어떤 강력한 유전자, 그리고 그것이 문제인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이성을 하필 모두 물려받아 가슴을 뜯으며 산다. 심지어 그것을 깨달은 것도 오래 지는 않았다. 위의 3대를 보자니, 다들 그렇게 잘 모르고 사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의 4대가 되고 싶지 않다.
내가 노력하고 해 봐도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마주한 순간 타고난 대로 이미 일어나 버리는 느낌과 감정, 그것이 밖으로 새어나가기 전 검열을 거쳐야 하지만 너무나 치열해서 속에서 불이 나곤 하므로 나는 혼자서도 갈등이 많다. 그 성격은 중화라는 게 없는 건지. 내 속의 소리를 듣는 것만도 복잡해서 예전엔 극단적 I의 끝을 달리며 혼자를 더 즐겼다. 그렇지 않다면 내 안의 것과 내보일 수 있는 것을 조금 분리해야 했다.
속으로야 어떻든 나는 대체로 참한, 이성적인, 현실적인, 따뜻한, 차가운 - 같은 수식어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상반된 수식어가 내 속처럼 어지럽게 섞여있긴 하지만, 그것 모두가 나다. 꽤 이상적인 성격을 겉포장으로 내세우고 안과 밖의 온도차는 어쨌거나 내가 겪어야 한다. 그게 맞다.
하지만 그 틈이 좀 커서 아무리 차곡차곡 빚 갚듯 메워가고 있다 해도 외부의 만만찮은 이를 만나면 터져 나오고 만다. 나는 주로 직장생활에서 그것을 겪었고, 그땐 그냥 피해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나처럼 못난 것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가끔 그런 이들을 만나면 안도감이 들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한 미움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내가 아무리 나를 처절하게 성찰한 축이라도, 어떻게 그것조차 수많은 남이 보는 것과 정확히 일치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가장 잘 안다 - 그건 오만이다. 생의 후반을 달려가는 분도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과 남이 생각하는 자신의 괴리가 상당한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런 성격이 주변인을 피곤하게는 하지만, 그런 걸로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저 사람들은 왜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아서 저렇게 모두를 힘들게 할까,라는 생각은 가끔 든다.) 나는 그저 내가 가진 속은 마이너스라서 남들 모르게 물아래서 발을 저어대며 조용히 지워내는 중이다. 남을 괴롭히며 살고 싶진 않다. 내가 괴로워 봤으니까.
허허, 그것 참.. 하며 모든 걸 웃어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절대자를 믿는 것이 아닌 나 자신, 내 감정의 뿌리를 찾는 것, 모든 것은 (과학적 원리와도 같게) 돌고 돌뿐이니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데서 내가 궁극적으로 갖고 싶은 생각과 맥을 같이 하기에 나는 언젠가부터 불교의 정신을 내 철학처럼 삼았다. 그렇게 살고 있는지는.. 아직은 멀었고, 몇 십 년 뒤에 다시 물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리 앉았다 저리 앉았다 한다. 앉아봐야 알 수 있었다. 정해진 내 자리의 범위가 있었겠지만, 어떤 자리가 내게 맞는지, 아니 적당히 어울리며 살고 적당히 감정의 온도차를 버틸 수 있는지 아직도 찾고 있다. 앉아보며 목표 또한 계속 조정 중이다. 삶은 흐르니, 아마 오래 앉은자리라도 마지막 자리는 아닐 것이다. 큰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내가 어디쯤 옮겨가고 있는지 점검하게 된다. 처음의 자리보다 멀리 벗어났기를 바란다. 더 나은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