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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인셋 Apr 16. 2024

서른, 마흔이 왜 불안한가요?

불안을 건드리는 사회


생각해 보니 서른에도 그랬다. 다들 서른을 다가와선 안 될 마감인 것처럼 대했고, 그도 아니면 딱 대학시절 군입대를 앞둔 친구들처럼 굴었다. 동성의 친구들에게서 좀 더 나이 앞 의연함을 느끼지 못했던 건 그런 경험의 차이 때문이었는지, 나이의 상징성 때문이었는지, 단순히 복합적인 감정의 요동때문이었는지는 모른다. 그런 호들갑, 그리고 한숨이 왜 내게만 그다지 불필요하게 느껴졌는지 그때는 몰랐다.


내가 대단한 걸 이미 이루어서 그랬냐 하면 절대 아니다. 나도 그들과 같은 고민을 했고, 이룬 것이 없었다. 남들이 정해둔 숙제도 역시 하지 못했다. 숙제하는 삶이라니. 삶의 연속성을 생각하면 학교에 간다거나, 취업을 하는 일 같은 것이 큰 이벤트이지 해가 바뀌고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것이 대단치는 않은 것 같았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왠지 정기적으로 받아야 할 상대평가와 그 성적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은 못 될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다 고만고만한 삶이라 해도 똑같은 삶은 하나도 없다. 다양성이 적은 사회에 사는 우리는 모두 그 흐름에 속하지 못할까 불안하다. 개개인에게는 그다지 쓸모없는 통계도 한몫했을 터였다. 내가 정확히 어디쯤 속하는지는 적어도 내 행복을 찾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대단히 다를 것이 없는 이들 사이, 우월감이든 소속감이든 제공해 주며 원하는 대로 이끄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집단의 이익이든, 기업의 수익이든 하는 것들에 쉬이 휘둘려왔다. 남들보다 대단하게 살라며 교육받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라며 모순을 종용당하는 삶. 하지만 여태 집단이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새겨진 유전자의 본능을 거슬러가는 큰 흐름은 이미 시작됐음이 틀림없다.




나는 되려 나이 먹을수록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불안했던 어린 시절에 비하면 그다지 크게 변한 것이 없었으나 키우며 손 갈 것이 없었다던 내 부모님의 회상에 비하면 내 속은 그만큼 평탄치는 못했는지 삶과 죽음, 철학과 심리에 골몰하며 지내온 시간이 길었다. 20대에 티 나지도 않게 뒤늦은 방황을 좀 하고는 드디어 보이지 않게 날 막고 있던 순종과 타협의 벽을 넘고서야 내 삶이 시작된 것 같았다. 그래봤자 그 또한 어른들의 계산 밖도, 대단한 일탈도 아니었을 테지만 그 당시는 평생 들고 온 죄책감이나 경제적 의존을 벗어던지는 게 상쾌하지 않을 리 없었다.


20대나 10대가 그립지 않으냐 하면, 좀 더 친구나 공부만 생각해도 되었던 때였음은 부럽기 그지없으나 지금 생각하면 너무 사소한 것에도 밤샌 고민이 많을 때였고, 사회적 스킬도 너무 적어서 사람을 대하는 데 두려움이 많았다. 모든 곳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배워야 겨우 이만큼이 되는데. 너무 아깝다. 물론 그때의 체력은 조금 탐이 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그때대로 역시 골골대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분명 부모님에 비하면 쓸만한 몸뚱이다.


어떤 설문에서 어르신들에게 가장 돌아가고 싶은 나이로 40대가 꼽힌 것은, 인생 전체에서 가장 재력과 체력과 시간적으로 그나마 여유가 있던 때가 바로 그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적당히 쌓인 삶의 노하우와 이제 조금 삶이 무엇인지 끄트머리쯤 알 것 같은 때, 운이 좋다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정도의 삶의 안정과 여유. 그것이 찾아오는 때 역시 누구에게나 다를 수 있고, 그 소중함을 알고 노력해야만 마음속까지 찾아와 준다는 것도.


이제야 조금 알겠다 싶은 것은, 삶은 부모님이 바라 마지않던 장래희망처럼 사실은 누구에게나 대단한 것이 아니며, 상황 하나하나에 힘주고 연연하며 살아갈 것도 아니라는 것. 포기와 갈등 속에서 삐걱거리다가 마침내 톱니바퀴가 맞춰지고 내 자리를 찾았다고 여길 때, 일과 마찬가지로 내 삶의 효용성을 느낄 때, 어느 날 갑자기라도 산들바람처럼 내 머리를 쓸어주는 게 나이 먹는 것, 그리고 또 시작할 힘이라는 것.


나이는 누군가 세기 좋으려고 만든 것이고, 그저 나는 나이가 몇이든 살아가는 중이다. 나이와 관련해 두려운 것이라면 나잇값을 못 하는 것뿐, 내가 주인인 삶에서도 행복 하나, 의미 하나 찾아가는 일이 쉽지 않은데 중간표시선 하나마다 복잡한 의미부여를 하며 스스로를 먹이로 내던져 줄 이유가 없다. 누구에게든 살아있는 한 아직 결과물인 것도, 그리고 단지 결과물이어서도 안 될 삶에 실체도 없는 불안으로 내 선택을 방해받지 말자.


두 번째 산들바람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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