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한강 작가의 두 작품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두 작품은 각각 제주 4.3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써 내려간 글이다. 몇 해 전, <소년이 온다>를 읽고 받았던 충격을 기억한다. 담담하게 당시의 학살을 이야기하는 문장들이 나를 붙잡아서 책장을 쉽게 넘기지 못했다. 책장을 덮은 뒤 뭉근하게 올라오는 무력감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난 뒤에도 찾아왔다. 동시에 학살의 역사에 대해, 한강이 이야기하는 광주와 제주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졌다. 초월적인 힘 앞에서도 작별하지 않는 인선과 버스를 가득 채우던 여공들처럼 맞닿은 두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경하가 유언장 작성을 시도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서성거리던 경하는 친구 인선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간다. 그녀는 손가락이 잘려 수술한 상태였고, 경하에게 제주에서 머무르며 자신의 앵무새에게 밥을 줄 것을 부탁한다. 어렵게 도착한 제주도에서 경하는 과거 자신이 인선에게 제안했던 ‘프로젝트’를 마주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인선이는 제주로 돌아왔고, 경하의 앞에 4.3의 기억과 기록을 늘어놓는다.
가장 놀랐던 점은 <작별하지 않는다> 대부분 구조와 표현이 비유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보다는 코멘터리에 가까운 서술방식이다. 인선의 어머니가 겪은 그 날의 기억은 인선이의 입을 통해, 다시 경하의 독백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들은 이야기로, 옷장에 갇혀 있던 신문조각으로, 인선의 술회를 통해 전해진다. 누군가를 거쳐 전해진 이야기는 조금씩 깎여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두 귀로, 눈으로, 피부로, 가슴으로 느낀 것들이 작은 글자 안에 구겨져 전달 되었음을 헤아리면 감히 당시의 참상을 그릴 수 있다.
사건을 표현하는 방식처럼, 학살 피해자의 고통 역시 글의 전면에 세워진 인선과 경하를 통해 드러난다. 작품 초반에 묘사되는 경하는 무언가에 줄곧 시달린다. 길거리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을 보고 얼어붙고,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유언 쓰기를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살아남는다. 이는 4.3사건으로 추정되는 주제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관련 자료를 찾기 시작한 이후로 나타난 증세이다. 경하의 위로 수없이 많은 희생자가 겹쳐 보인다. 그들이 방해받은 정상의 삶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그 방해는 작가의 묘사대로 불안도, 전율도, 돌연한 고통도 아닌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이다. 희생자들에게는 작별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되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의 전복도 없이 이들은 ‘철저한 피해자’다. 학살은 몇 년 전 그곳, 기억 속 어디에 멈춰있지 않는다. 계속해서 피해자의 앞에 무거운 쇳날로, 차가운 눈송이로 나타난다. 모든 경하들에게 학살은 70년간의 무기 없는 전쟁이었다.
이 소설은 종이컵으로, 얇은 실로 말을 전해주는 종이컵 수화기 같다고 생각했다. 한강은 비유적인 표현과 구조를 통해, 경하와 인선이를 통해, 종이와 활자를 통해 무거운 이야기를 전했다. 어쩌면 자행된 학살 그 자체보다는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 올바른 추모방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러한 전달 방식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한강의 추모는 ‘작별하지 않음’으로써 완성되는데, 글에서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인선이의 손가락을 통해 ‘작별하지 않음’을 설명하는 부분은 아주 인상적이므로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손가락이 잘린 인선이는 봉합수술 후 신경을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바늘로 찔러 피를 흘려보낸다. 바늘은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사고 당시의 기억을 끄집어내기에 공포스러운 존재이다. 그러나 바늘로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은 곧 ‘손가락이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인선은 손가락에 피가 도는 것을 느끼기 위해, 곧 손가락을 살리기 위해 주삿바늘을 찔러넣는다. 역전된 인과관계는 이 소설에서 공식처럼 작용한다. 유서를 고쳐쓰기 위해 계속해서 아린 기억을 꺼내는 경하와, 짧은 기록영화를 위해 그 날을 발음하던 엄마의 입을 떠올리는 인선이. 그것들은 손가락에 피를 돌게 만드는 주삿바늘이었다가, 손가락이었다가, 피가 된다.
한강은 내내 작별하지 않을 것을 이야기한다. 계속해서 접붙인 손가락 사이로 주삿바늘을 찔러넣고, 피가 돌게 하고, 다음 고통의 순간을 고요하게 기다릴 것을 요구한다. 흥미로운 점은 어떠한 부분에서도 ‘딛고 일어나라’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학살의 기억은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고통스러울 것을 강조하는 작가를 통해 제목의 함의를 파악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희생자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작별 여부를 선택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작별하지 않을 의무는 기억을 전해 들은 우리들의 것이다. 선택권을 버리고 기꺼이 고통스러울 것, 그것이 한강이 이야기하는 추모이다.
소년이 온다
<소년이 온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있다. 총에 맞아 죽은 친구를 찾는 동호를 시작으로, 그 해 5월 광주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투쟁했던 6명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들은 혼이 되어 썩어가는 자신의 몸뚱아리를 내려다보면서, 검열관의 커다란 손바닥으로 뺨을 맞으면서, 모나미로 짓이겨졌던 손가락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들은 고귀하다’ 끊임없이 되뇌면서, 아들을 제 손으로 묻으면서. 그들은 투쟁했다.
날 것의 기억을 마주하는 것은 힘들었다. 구타로 얼룩진 여자의 몸을 ‘여자의 이마부터 왼쪽 눈과 광대뼈와 턱, 맨살이 드러난 왼쪽 가슴과 옆구리에는 수차례 대검으로 그은 자상이 있다. 곤봉으로 맞은 듯한 오른쪽 두개골은 음푹 함몰돼 뇌수가 보인다.’고 표현하면서 한강은 당시의 참상을 헤아리는 것조차 오만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아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아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썩어가는 육신 위에 떠다니는 정대의 독백은 인상적이다. 왜 자신을 쐈는지 끊임없이 추궁하는 모습은 안쓰럽다. 정작 총알을 박은 이는 독백하지 않기에 정대의 독백은 더 시리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