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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외곽 한국여자 Jun 18. 2024

이제와 항상, 영원히

밤새 이어진 빗소리 덕분에 잠을 깨지 않고 아침을 맞은 오늘에 감사하며

2024년 6월 18 화요일 오전

오늘은 나를 위해 욕조에 물을 받았다.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서서히 그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차갑고 메마른 내 육체를 따스하고 비옥한 그 품속에 고이 누인다. 창 밖으론 밤새도록 내리던 비가 여전하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 위로 내려앉는 빗방울 그리고 이 마음 다독여주는 빗소리.

브런치 첫 글에 썼던 음악을 다시 클릭한다. 백일이 지나도 곰이 인간이 되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글이라는 걸 계속 써야 할까. 비와 함께 스며드는 저 음악에 눈물이 따라흐른다. 하지만 물속에서는 무엇이든 수용이 된다. 지금 이 시간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련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 사치스러운 감정은 이제 뒤로 하고 나가서 밥을 해야 한다. 벌써 열 시다. 한 시간을 이렇게 있었다. 11시 반에 점심픽업이 있다. 다시 물 밖으로 나설 시간이다. 그녀의 노래를 달고 나갈 순 없다. 이제는 어울릴 수 없는 이 음악을 끈다. 물 밖으로 발을 다시 천천히 내딛는다.



2024년 6월 13일 목요일 오전

아이는 거실에서 필통과 잘 놀고 있다. 내 방에서 꺼내온 형광펜 다섯가지 색깔을 자신의 필통에 몽땅 다 집어넣는다. 지퍼가 잠기려하지 않는다. 열고 닫고 열고 닫고를 되풀이한다. 어느 것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방법이 없어 한 두 개를 꺼내야 하는 상황인가 보다.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하느라 표정이 꽤 심각하다. 별 것도 아닌 것에 저렇게 집중도를 높일 일인가 싶어 우습기도 하고.. 그러다 저 아이에겐 지금 저것이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일일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또 어떤 결정을 내릴지 사뭇 궁금해지기도한다.

하루종일 쉴 틈 없이 분주한 작은 입, 미니미한 손, 쪼끄만한 코, 시도 때도 없이 흔들며 춤을 추고 있는 작은 궁뎅이..마냥 귀엽기만 하다. 엄마가 아닌 할미의 마음이 든다.

아이의 학교 선생님이 아파서 수업은 지난주부터 대체교사가 있는 월, 금만 있다. 학교에서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별 수 없이 학교로 오는 아이들은 전 학년으로 한 두 명씩 보내야 하는 입장이라고 가능하면 등교는 이틀만 하라고 했다. 화, 수, 목은 집에서 하루종일 저렇게 혼자 논다.


제이는 화요일과 목요일이 재택근무다. 오늘, 날이 너무 예뻐서 지하 서재에 있지 않고 올라와서는 거실에서 커피를   하면서 아이의 필통놀이를 구경하고 있다. 아름다운 햇살에 넋을 잃고 진즉에 무장해제되어 정원에 이끌리듯 나가 한참을 들어오지 않고 있는 마누라도 창을 통해 보고있다.  머리얼굴을  장미처녀들 앞에 자리잡고 트란자에 누워 폰으로  적고 있다. 그렇다. 그녀는 이틀  행복의 대명사인  작가의 글에 댓글을 달았다가 그의 독자 한분에게 대댓글을 하나 받았다. 어쩌면 일면식도 없는 완전한 타인의 느낌, 그것이 객관적인 판단일  있다. 뭔가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녀는  강렬한 인상이 공기 중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기 전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늘, 맑음이라는 예쁜 꼬까옷을 입혀 고이 박제하고자 백일을 구실 삼아 짧은 글을 하나 발행했다. 그녀가 보고 있던 , 나비,  그리고 바람. 그들의 인내 개화 그리고 예정된 낙화의 모습까지 담고 있는 위의 사진도  자리에서 찍어 글의 배경화면으로 썼었다.


이번달부터 마이너스통장에서 해방되었다. 특별히 갑자기 돈 들어갈 일이 없다면 다음 달도 그는 저 평온함을 유지할 이유 중에 하나가 또 생기는 것이다. 마누라의 실업급여가 8월이면 끊기는데 그녀는 구직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마는 것인가 물어봐도 이상하게 평소와 다르게 일을 찾는데 별 의지를 보이지 않아서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 여름방학에는 그녀가 돈을 좀 풀어 함께 여행을 하자고 하니 기분이 꽤 상큼할터이다. 지난 11월, 긴 겨울을 나기 위해 기름통 반을 채우는 비용 1900유로는 그녀가 지불했지만, 보통은 매년 한국으로 가는 티켓을 사고 친지 선물을 사고 하는데 자기가 벌어서 모아놓은 돈을 거의 다 써버리는 그녀인데 며칠 전에 올여름에는 한국을 안 간다 선포까지 해주니 그의 기분이 참 좋다.


제이재택근무, 아이학교 없음, 날씨 좋음, 은행잔고숨통 트임 그리고 브런치 탈퇴유혹을 몇 번이나 뿌리치고 백일이나 붙어있었다는 이유까지 추가하여 그녀는 제이가 제안한 ‘외식’을 받아들인다, 그것도 흔쾌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완벽에 가까운 이 평온함에 ‘여유롭다’라는 낯선 감정까지 찾아든다. 이게 ‘행복’인가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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